조심태(趙心泰 : 영조 16년-정조 23년, 1740∼1799) 장군은 조선 후기 정조 때의 무신. 자는 집중(執仲). 본관은 평양(平壤). 시호는 무의(武毅). 무과에 급제한 영조 44년(1768)부터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직한 정조 12년(1788)까지 약 20년간 홍충도(洪忠道) 수군절도사, 홍충도 병마절도사, 함북(咸北) 병마절도사, 삼도 수군통제사를 역임하는 등 주로 지방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정조 12년 좌포도대장을 비롯하여 포도대장, 수원부사, 훈련대장, 금위대장, 감동당상, 수원부 유수, 어영대장, 선무사 구관당상, 한성부 판윤, 총융사, 형조판서, 장용대장을 역임하고, 사후에 좌찬성으로 추증되고 무의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로 정조의 신변 보호와 생부인 사도세자의 묘소 이장 및 수호 그리고 수원 화성의 축성과 관리를 위한 지휘관으로 근무하였다. 조장군의 묘소는 지금 김포의 나진교 인근 평양 조씨 묘역에 있다.

조심태 장군의 가문 이러한 무의공 조심태 장군의 가문은 장군의 고조모와 조모, 장군의 부인 3대가 나라로부터 열녀(烈女) 정문(旌門)을 받은 명문가이다. 지금 김포의 나진교 인근 평양 조씨 가문의 묘역에 이 분들의 다음과 같은 현판이 걸려 있는 정려각이 있다. 정려(旌閭)는 충신, 효자, 열녀들을 그 고을에 정문(旌門)을 세워 기리던 일을 말한다.

   *다음 정문에 관한 자료는 평양 조씨 문중의 조시현(趙時顯 : 충숙공이 9대 조부의 백형임)이 제공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시 충숙공 조정익 처 증정부인 예안 이씨 열녀정려지문(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 諡 忠肅公 趙廷翼 妻 贈貞夫人 禮安李氏 烈女旌閭之門) :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後金)이 인조 5년(1627)에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에 이어, 인조 14년(1636) 나라 이름을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10만 대군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이 발발하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왕자를 비롯한 비빈과 귀족들을 강화도로 먼저 피난가게 하고 세자와 백관들을 국왕이 친히 거느리고 그 뒤를 따르려 하였으나, 이미 적들로 길이 막혀 갈 수 없게 되자 부득이 소현세자와 정신(廷臣)들을 동반하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온 나라는 수라장이 되었고 수많은 피난민으로 소용돌이쳤다.

   조심태 장군의 고조부인 충숙공 조정익(廷翼)은 의병으로 출정하기 위하여 막내 아우인 조종휘(廷彙)를 보내어 가솔을 이끌고 유정량(柳廷亮)의 의병에 합류하였다. 조정익이 강화성에 입성하였을 때는 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정익이 그의 처 예안(禮安) 이씨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대대로 충효를 지켜 전해 내려온 집안으로 이제 이 나라의 수치스러운 꼴을 보고 어찌 조상님을 대하리오.

이제 그 열선조의 자손으로서 평생에 글을 읽은 것은 바로 오늘에 쓰기 위함이라.” 하고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니, 그의 처 이씨가 그 칼을 빼앗아서 먼저 자결하였다. 이때 이씨가 말하기를, “남편이 작고하시면 그 후 일개 아녀자가 외롭고 고달파서 이 세상에 홀로 남아 무엇에 쓰리오.”하며 그 칼로 목을 찔러 먼저 자결하였다고 한다. 남편의 칼로 자결한 예안 이씨의 시신을 염습할 때 적의 궁수병(弓手兵) 수십 명이 덤벼들자 조정익이 맞서 싸우다가 5,6시의 적의 화살을 맞고 마니산 절벽에 머리를 부딪쳐서 자결하였다.

충숙공은 독자인 조유(猷)에게 살아서 가계를 잇고 제사를 모시는 것도 효라고 하면서 종자(노비)를 앞세워 급히 떠나게 하였다. 그런 연후에 공도 역시 자결한 것이다. 조유는 위병장인 이모부 유정량을 만나러 가던 중 적의 포로가 되어 세자와 비빈 및 봉림대군 일행과 함께 남한산성을 거쳐 중국 심양까지 압송되었다. 포로로 잡혀간 조유는 포로 중에서 가장 젊은 17세 소년이었으나, 그는 심양왕 밑에 있던 가장 악질적인 적장 말질개(末叱介)를 암살하고 그 시신을 연못에 수장하였다.

이 사건은 ≪심양일기《審陽日記》≫(병자호란 후 인질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의 심양 포로 생활시의 일기) 등에 기록되어 있고 통어사공가장(通御使公家狀) 등에 실려 있다. 조유는 적지에서 살부(殺父)의 원수를 갚은 것이다.

1638년 충숙공과 예안 이씨를 선영에 안장하는 날, 하관하려고 하는데 아들 조유가 도착하니, 이 기이한 사연을 본 세인들이 충숙공과 예안 이씨와 그 아들의 만고 효열에 하늘이 감복함이라고 하면서 감루(感淚)를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무의공의 고조 조정익은 이렇듯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받았다(정조실록 정조 9년 7월 26일, 정조 22년 3월 19일조 참조).


  영조 34년(1758)에 부군(夫君) 충숙공이 중직대부사헌부집의(中直大夫司憲府執義)에서 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로 승증직(陞贈職)됨에 따라서 숙인(淑人)에서 숙부인(淑夫人)으로 승급되었으므로 현판문을 개칭하였다. 정조 20년(1796)에 정조가 강화도 충렬사에 거둥하여 친향(親享) 후 황단(皇壇)에 서서 당시의 강화전란사(江華戰亂史)를 가지고 오라고 명하여《신담록(薪膽錄)》을 친람하여 감동하고 조모(趙某)는 일개 선비로서 현상백중정경(賢相伯仲正卿 : 책임 있는 높은 벼슬아치)들도 못 이룬 공이 크다 하고 즉석 교지(敎旨)로 정경(正卿)을 가증하라 또 시호를 의논하라 하니, 자헌대부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시충숙(資憲大夫吏曹判書 兼 五衛都摠府都摠管 諡忠肅)이라고 증직(贈職), 증시(贈諡)하였다.

따라서 숙부인(淑夫人) 예안 이씨도 정부인(貞夫人) 예안 이씨로 증승계(贈陞階)되었다. 정려각(旌閭閣) 입구에 홍살문까지 세워서 세인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10년 국치 이후 왜정의 도외시와 종손의 생계가 어려워 문루와 홍살문이 손괴되어 근근이 현판만 남아 종중의 주선으로 현위치에 초간(草間)을 세웠다. 그때가 1950년 6.25 전란 이후이며, 정조 연대 이후 금일까지 250여년이 지났다. 충숙공은 전 김포문화원장이며 현재 김포사랑운동본부장인 조한승의 12대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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