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군하리(郡下里)의 역사문화 유적1) 통진향교통진향교는 1127년(고려인종 5)에 창건됐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둔 것으로 보아도 아마도 그 무렵에 제대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통진현」 조에 ‘향교는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통진향교는 전학후묘 형태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50미터쯤 들어가면 외삼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를 볼 수 있다. 경내 오른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가, 그 위의 솟을삼문 안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위치한다. 대성전에
Ⅰ. 김포시의 형성과 월곶면의 변천1. 김포시의 형성2. 월곶면의 변천과정Ⅱ. 군하리의 변천과 역사문화1. 군하리의 변천 과정과 구성1)군하리의 연혁과 명칭2)군하리의 구성2. 군하리의 역사 문화 유적1)통진향교2)통진 현감 부사 선정비3)통진이청4)봉수대5)군하리장6)군하리 만세운동7)진따배기Ⅲ. 군하리 역사 문화의 가치-------------------
김포대학 전홍건 이사장을 칭찬합니다.추천자 : 이하준 김포문화원장 미국 유학 후,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교수로 활동하던 전홍건 이사장.그는 고향인 김포에 아버지 전신용 전 이사장과 함께 김포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당시 심재승 통진중고등학교 설립자와 함께 60억원의 자금을 출연하는 등 재정적 뒷받침을 한 그는, 설립 이후에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데 있어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커지는 대학의 규모를 컨트롤하지 못해 내홍이 발생, 교과부의 관선이사 파견 경영이 8년간 유지되었고 그 사이 내실이
김포문화의 벨 에포크(Belle Epoque)를 위하여오늘은 김포에 대한 말씀을 좀 드려야 하겠습니다. 문화 혹은 문화의 활성화라는 것이 우리 삶의 가장 작은 단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시사나 미시사, 어떤 공동체의 역사와 문화를 어떤 관점에서 다루어야 하는지 굳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인간 개인이나 아주 작은 공
올해는 을미년(乙未年)으로 양(羊)띠의 해이다. 羊띠 해에는 며느리가 딸을 낳아도 구박(驅迫)하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오는 것처럼, 羊은 천성이 온순(溫順)하고 상서(祥瑞)로운 동물임을 뜻하듯이 금년(今年)은 광복(光復) 70주년(周年)이 되는 해로서 국운(國運)이 크게 기대(期待)되는 해이다. 동양(東洋)에서는 우리 조상(祖上)인 동이족(東夷族)이 세운 은
최영찬 작가의 신작 가 출간됐다.최영찬 작가는 김포한강신도시가 조성되면서 김포에 터를 잡게 된 새로운 이웃이다. 두터운 안경렌즈 사이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눈빛이 인상 깊은 최 작가는 자신이 새로 자리잡게 된 김포의 문화와 역사를 알기 위해 문화원을 찾아와 김포의 유산을 토대로 작품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이하준(김포신문 회장, 가톨릭대 명예교수) 중국 전국시대 추(鄒)나라 사람인 맹자(孟子)가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바로 백성이다. 좋은 왕과 그렇지 않은 왕의 기준을 바로 백성을 위하는가 아닌가로 판가름하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신문이란 어떤 신문인가. 역시 독자 즉 시민들을 위한 신문이라 하겠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민들을 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가
신묘년, 김포에 솟은 해는 李河俊(본지 회장/가톨릭대 명예교수/중봉조헌선생선양회 이사장) 신묘(辛卯)년 장엄한 해가 솟는다 붉은 해가 솟는다 지난(至難)한 어둠을 뚫고 희망찬 빛을 쏟아낸다 김포의 드넓은 산하, 한 점 어둠 없이 비춘다 비춘다 남김없이 비춰 김포 시민의 마음 깊숙한 곳, 그늘까지 걷어낸다. 김포의 금강산, 문수산에 솟은 해는 염하와 한강을
이하준(가톨릭대 교수·중봉조헌선생선양회 이사장) 김포신문이 출범한 지 20주년 되는 해이다. 우리는 김포의 대표적인 지역일간지로 ‘정론직필’을 실현하며 김포 역사의 산 증인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김포와 고락을 함께 한 세월만큼 김포와 김포시민에 대한 애정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김포시민이 우리
李 河 俊 (가톨릭대학교敎授, (社)重峯趙憲先生宣揚會 理事長) 殷代의 甲骨文에서 한 해, 두 해의 해를 나타낸「歲」字의 字形을 찾아보면 「 → 」형태로 쓰이다가 周代의 金文에서는「 → → 」의 형태로 쓰였으며, 秦代의 小篆에서는 「 」와 같이 변형되어 오늘의「歲」字가 된 것이다. 이 字形을 풀어 보면「步」字와「戌」字의 合體字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