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하리 마을의 역사문화적 가치(3)

중앙도서관 소장(통진지도)


2. 군하리(郡下里)의 역사문화 유적
1) 통진향교
통진향교는 1127년(고려인종 5)에 창건됐다. 1413년(태종 13)에 현감을 둔 것으로 보아도 아마도 그 무렵에 제대로 운영되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통진현」 조에 ‘향교는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통진향교는 전학후묘 형태로 되어 있다. 홍살문을 지나 안으로 50미터쯤 들어가면 외삼문 역할을 하는 풍화루(風化樓)를 볼 수 있다. 경내 오른쪽에는 교육 공간인 명륜당과 동재가, 그 위의 솟을삼문 안에는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위치한다. 대성전에는 5성과 2현 및 18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역사 속에서 몇 번의 재건을 거쳤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건물은 공포(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형태와 수법으로 볼 때 17세기 말의 건물로 보이며 도내 향교 건축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 말기에 몇 차례 중수되었다가 항일 시대에 김포향교에 합설되면서 폐쇄되었다. 광복 후 그 기능을 되찾았다. 봄(5월11일)과 가을(9월 28일)에 두 차례 석전을 봉행한다. 1983년 9월 1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0호로 지정되었다.

2) 군하리 비군(碑群)

월곶면 군하리 83-4번지, 구 월곶면사무소에는 17기의 비가 일렬로 늘어서 있다. 이 비군은 이 고장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던 현감, 부사, 관찰사 등 목민관들의 선정 불망비(不忘碑)이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건립된 것들로서 향토사와 역대 행정관들의 치적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86년 3월 3일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비를 세운 시기는 1656년부터 1890년에 이르며 재료는 대리석 또는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3) 통진이청

조선시대 관아건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통진이청'(경기도 문화재 자료 제166호)은 2013년 9월 복원됐다. 조선시대 통진부 이청 건물로 일제 강점기 동안 주재소로 사용됐다. 통진이청은 옛 통진 현의 부속건물로 측면 2칸 규모다. 기록으로는 정면 7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었지만 복원 전까지는 서리들의 집무처로 사용되던 건물만 남아 있었다.
복원은 가급적 사용가능한 구제를 모두 재활용하고 문화재 자문위원들의 철저한 검증과 자문 등을 거쳐 정면7칸 측면2칸 총 14칸 규모의 원형 그대로 복원됐다.

4) 봉수대

김포에는 월곶면의 남산 봉수, 북변동의 냉정산 봉수, 대곶면의 수안산봉수가 있었다. 이외에 인천의 백석산 봉수, 서울 양천의 개화산 봉수도 예전에는 김포에 속해 있었다. 김포의 봉수는 제5로의 연변 봉수 직봉에 해당했는데 『중보문헌비고』에 따르면 그 연결 노선은 순천에서 충청도와 경기도를 거쳐 백석산(인천), 수안산(대곶면), 대모성(강화), 진강산(강화), 망산(강화), 교동규산(강화), 하음산(강화, 남산(강화), 남산(월곶면), 냉정산(북변동), 개화산(서울), 경봉수로 이어졌다.

월곶면의 남산 봉수는 현재 군하리 봉수대지로 불리는 곳에 있었다. 월곶면 군하리 323번지에 있는 해발 180미터의 남산 정상으로 향토유적 제6호(1986.3.30.)로 지정되었다. 『신동국여지승람』 통진현 봉수조에서는 “남산 봉수는 동쪽으로 김포현 북성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강화 송악산에 응한다”라고 하였다.

5) 군하리장

항일시대에 들어와 기존의 원통장을 대신한 장이 월곶면 군하리장과 하성면 마곡장이다. 통진이 별도의 군에서 김포군으로 흡수되면서 월곶면, 대곶면, 양촌면, 하성면의 4개면이 되었다. 군하리장은 강화의 부내장과의 연결을 염두에 둔 장이어서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우시장도 있었다.

6) 군하리 만세운동

월곶면 군하리의 만세운동은 김포지역에서 최초로 전개된 만세시위운동으로서 의의가 있다. 박용희(목사),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본명 이경덕) 등이 주도한 월곶면의 만세시위운동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주도자가 박용희 또는 이살룸으로 파악된다.

김포지역에서 3.1민족운동이 전개된 것은 1919년 3월 22일 당시 월곶면 군하리와 검단면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된 이후부터이다. 김포지역의 3·1민족운동에 참가한 총 인원은 약 1만 4천여 명에 이르고,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으로 120명이 부상을 했고, 200명이 체포를 당하였다.

7) 진따배기

통진읍에서 오리정으로 향하는 48번국도 동편의 들 중 진따배기라는 곳이 있다. 진따배기란 삼한시대에 소도(蘇塗:삼한시대에 천신을 제사하던 성지)에 세웠던 장대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소도에 신과 교감하는 의구(儀具)로서 장대를 세우고 그 끝에 새, 용의 조각이나 방울, 북 등을 달아 천신제를 지냈다. 소도는 지역에 따라 소터·솔터·솟대 등으로, 장대는 짐대로 변화해 전국 여러 곳의 지명에 남아 있다. 마을의 소지명에 짐대배기, 진따배기, 진또배기 등 여러 변형으로 남아있고, 마을 이름에는 짐댓말·진담말로, 방울을 달았던 곳은 영촌(鈴村) 또는 방울터라 불러왔다. 이런 지명이 남아 있는 마을은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고 있었고, 또 그런 마을에는 제사장을 겸한 존장(尊長)이 살았었다는 의미가 된다.


Ⅲ. 결론을 대신하여 – 군하리(郡下里) 역사문화의 가치

월곶면은 삼한시대부터 분진현이 위치한 역사가 있는 지역이다. 현재 10개 법정리에 22개 행정리로 되어 있으며, 그 중 7개리가 접경지역으로 휴전선과 불과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안보의 요충지다. 접경지역인 관계로 항공대가 위치해 있고 문화재보호법, 군사시설보호법 등으로 제한을 받고 있어 개발이 지연되고 있으며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통진군(현 월곶, 통진, 대곶, 양촌)은 한강을 이용한 십여 개의 뱃길을 끼고 있어 조선시대까지 포구의 고장으로 많은 역사를 품고 있다. 조선시대 말 통진군은 3등 군수가 김포군은 4등 군수가 다스리는 지역이었다. 통진군의 행정의 중심지가 군하리다. 과거 행정중심지로 많은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곳이고, 개발의 손길에서는 멀리 떨어져 많은 유적들의 발굴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하지만 마을 인구감소와 고령화로 인해 누대에 걸쳐 쌓아오며 구전(口傳)되던 마을문화가 점차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고 상당수는 이미 소실돼 버렸다. 더 이상의 전통문화의 소실을 막기 위해서는 발굴 및 기록화 작업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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