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자 - 이하준 김포문화원장

Ⅰ. 김포시의 형성과 월곶면의 변천
1. 김포시의 형성
2. 월곶면의 변천과정
Ⅱ. 군하리의 변천과 역사문화
1. 군하리의 변천 과정과 구성
1)군하리의 연혁과 명칭
2)군하리의 구성
2. 군하리의 역사 문화 유적
1)통진향교
2)통진 현감 부사 선정비
3)통진이청
4)봉수대
5)군하리장
6)군하리 만세운동
7)진따배기
Ⅲ. 군하리 역사 문화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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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김포지역은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 서울 근교인 수도권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개발된 측면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포지역의 개발을 마냥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지역발전이라는 논리 속에 자칫 지역의 문화유산이 소실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포지역은 현재 정치·경제·군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상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문화적인 자산 역시 매우 풍부하다. 그 중 역사문화적 자산은 랄프 옌센이 『드림 소사이어티』에서 예견한 콘텐츠 전쟁(content war)을 효과적으로 이끌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다. 랄프 옌센은 지식정보화사회 다음은 dream society, 즉 꿈과 감성을 파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도시의 미래를 논하면서 문화적 전통이나 신화 그리고 유명 인물 등의 소재를 이야기로 변형시키고 활용할 줄 아는 도시를 ‘스토리텔링 도시’(storytelling city)라고 명명했다. 따라서 역사문화적 유산을 잃는 것은 미래사회를 열어갈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동력을 잃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이 글에서는 김포지역 문화유산의 보고인 군하리의 형성과정과 그 문화적 가치를 구체적으로 거론하려 한다. 이것이 이후 보전방안 모색에 토대를 제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이다. 먼저, 김포의 형성과 군하리가 속해 있는 월곶면의 변천과정을 살펴서 김포지역의 전체적인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피려 한다. 그 다음, 군하리의 형성과정을 명칭의 유래를 논의하고, 통진향교, 비군(碑群), 통진이청, 봉수대, 군하리장, 진따배기, 군하리 만세운동 등 군하리의 유무형의 역사문화가 갖는 가치와 의미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군하리가 김포지역 더 나아가 수도권에서 갖는 역사·문화적 의의가 조금씩 드러날 것으로 기대한다.

Ⅰ. 金浦市(김포시)의 형성과 月串面(월곶면)의 변천

1. 金浦市(김포시)의 형성

현재 김포는 경기도 28시, 3군의 하나이다. 본래 고구려 때에는 금포현(黔浦縣)이었는데 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김포(金浦)로 정했다. 금포현(黔浦縣)일 때는 金浦縣(김포, 고촌, 검단지역), 분진현(월곶, 통진지역), 동성현(하성지역), 술성현(양촌, 대곶지역), 공암현(양서, 양동지역) 5개 현으로 나뉘었다. 이때 처음 김포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이후 김포는 장제군(長堤郡:부평)에 붙었다가, 고려 제19대 명종 2년(1182)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제20대 신종 원년(1198) 임금의 태가 묻힌 곳이라 하여 현령(縣令)으로 올렸다가, 조선 제3대 태종 14년(1414) 8월 양천현(陽川縣)을 합하여 김양현(金陽縣)이라 하였다. 그 뒤 10월에 다시 갈라 양천현을 금주(衿州:시흥군)로, 본 고을은 부평부(富平府)에 붙였는데 태종 16년(1416) 7월에 다시 김포현으로 복귀 되어 현령을 두었다. 제16대 인조 5년(1627)에 양주로부터 원종(元宗:인조의 생아버지)의 묘소를 이장하고, 인조 10년(1632)에 군으로 올리어 군내(郡內), 석한(石閑), 고현내(古縣內), 검단(黔丹), 노장(蘆長), 고란태(高蘭台), 임촌(臨村), 마산(馬山)의 8개 면을 관할하였다. 그 후 제26대 고종 32년(1895) 지방 관계 개정에 의하여 인천부(仁川府)에 딸렸다가, 그 다음해(1896)에 경기도의 관할이 되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통진군(通津郡)의 군내(郡內), 보구곶(甫口串), 질전(迭田), 고리곶(古里串), 대파(大坡), 반이촌(伴伊村), 상곶(桑串), 양릉(陽陵), 봉성(奉城), 하은(霞隱), 소이포(所伊浦)의 11면과 양천군(陽川郡)의 군내(郡內), 남산(南山), 장군소(將軍所), 가곡(加谷), 삼정(三井) 5면을 병합하여 다시 김포군이라 하고, 군내·검단·고촌·월곶·대곶·양촌·하성·양동·양서의 9개면 88리로 개편, 관할하였다.

1938년 1월 군내면을 김포면으로 고치고, 1962년 11월 21일 법률 제1172호 서울특별시 구역확장에 의하여 양동·양서의 2개 면을 서울특별시로 넘겨주어 7개면이 되었다.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부천군 오정면의 대장·도당·약대·삼정·내리·오정·원종·고강·작리·여월의 10개리와 계양면의 전역(박촌·병방·용종·방축·임학·동양·귤현·상야·하야·평리·노오지·선주지·장기·이화·오류·갈산·다남·목상·뚝섬 19리)을 편입하여 9개면이 되었다. 다시 1975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7817호에 의하여 오정면을 부천시로 넘겨주어 8개면이 되고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김포면을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에 따라 양촌면의 마송·도사·수참 등 3개리, 월곶면의 옹정·고정·서암·귀전·동을산 5개리, 대곶면의 가현리를 병합하여 통진면을 설치해서 당시 1읍 8면 92개리가 되었다.

1995년 3월 1일 검단면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고, 1998년 2월 3일 김포시 승격과 함께 김포읍이 김포1동(북변동·감정동·걸포동), 김포2동(운양동·장기동), 김포3동(사우동·풍무동)으로 분동됐다. 2003년 12월 30일 통진면이 통집읍으로 승격, 2009년 9월 1일 고촌면이 고촌읍으로 승격됐다. 2010년 5월 20일 김포3동이 사우동, 풍무동으로 분동되고, 2011년 11월 14일 양촌면이 양촌읍으로 승격됐다. 2012년 9월 24일 장기동이 신설되고, 2013년 10월 28일 김포2동에서 구래동이 분동됐다. 2015년 2월 2일 김포2동에서 운양동이 분동돼 현재 3읍 3면 7동이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김포는 동쪽은 한강 건너 파주군 금촌읍·교하면과 고양군 중면·지도면, 남쪽은 서울특별시와 부천시, 서쪽은 바다 건너 강화군 강화읍·선원면·불은면·길상면, 북쪽은 한강 건너 개풍군(開豊郡) 임한면(臨漢面)·흥교면(興敎面)에 닿아있는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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