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철학교양 수업 첫 시간에 한 교수님께서 칠판에 地平(지평)이라는 한자를 담담하게 적으셨다. 철학의 목표는 지평을 넓히는 것이라고. 교수님께서 지평을 설명하는 그 장면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다 기억난다. 그 때 뭔가 스파크가 튀었던 내 모습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실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 후로도 입사한 사장님의 아이디에 쓰인 '지평'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와 인연이구나.’ 느끼기도 했고, 신랑이 좋아하는 막걸리가 '지평'막걸리였을 때도 뭔가 반가웠다. '지평'이라는
기후생활실천협의회는 김포교육지원청과 함께 지역거점 돌봄 사업을 2024년 2월 1일부터 2025년 2월 28일까지 운양동 청수초등학교 옆 광장프라자 5층 512호-1에 거점지역을 두고 시작했다. 2024년 3월 4일 아이들의 첫 등교를 시작으로 ‘함께 돌봄’이 드디어 문을 열었다.‘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마음속에서 잔잔하게 메아리친다. 햇살 부서지는 하루는 봄이 왔지만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입학식을 마친 1~2학년 학생들이 올망졸망 모여 마을 세상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함께
봄의 초입이지만 꽃샘추위를 두어 번 겪고 나면 계절의 끝자락이 보일 것이다. 겨울의 외곽을 서서히 무너뜨리며 다가온 계절의 봄바람은 향긋하고 아릿한 연둣빛으로 들판을 채록하여 우린 가끔 작년의 봄을 기억하며 그리워할 것이다. 센바람이 물러간 척박한 땅에 솟아나는 파릇한 봄의 전령들이 온천지를 점령하고 겨우내 얼어있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것이다. 소생蘇生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한 생명의 재생과 움트는 것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막혀있던 가슴의 한 부분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봄은 그런 것이다. 이 무렵 자
동쪽으로 쭉 뻗은 출근길을 가다 보면 저 앞으로 기러기들이 줄지어 한강으로 간다. 아침 먹으러 가나 보다. 일을 마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서쪽 집으로 들어오다 보면 그들도 하루를 잘 보냈는지 ‘끼룩끼룩’ 거리며 산으로 향한다. 이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하늘이 높아지는 늦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저 북쪽 시베리아에 잘 있다가 찬 서리 맞으며 추운 겨울을 찾아, 먹이가 많은 한강을 찾아, 쉴 곳이 있는 작은 산을 찾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또 온다. 아이와 산책하다가 하늘에서 반가운 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들어 쳐다본다.
단체 생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접하다 보면 상대에 대해 또는 단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이미 다 아는 것처럼 착각하며 불손하게 아는 척하며 행동하는 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류의 사람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살다 보면 한쪽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듣고 판단하는 과오를 우리는 때때로 마주한다.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지 깨닫기도 전에 개인이나 조직 생활에 대한 이중잣대를 이미 들이대고 있다는 것이다. 양쪽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친분이 있는 한쪽의 이야기만 듣는 것으로 말이다. 해당 사안에 대해 공평히 다루려면 양쪽
19세기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 샤를 보를레르의 “나는 벌거벗은 시대의 추억을 좋아한다” 는 말은 삶의 시금석이다.나는 태양신이 조각상을 금빛으로 칠하기를 즐겼던 벌거벗은 시대의 추억을 좋아한다. 그 시절엔 남자와 여자가 민첩한 몸으로 거짓도 없고 고뇌도 없이 즐겼고 우주 만물은 그들을 격려하여 그들의 귀중한 신체의 건강을 단련시켰다. 질 좋은 산물이 풍요로운 다산의 여신에게 축복과 출산의 기쁨을 주던그 시절 아들들은 부담스러운 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우아하고, 건장하고, 강한 남자는 모든 모욕으로부터 깨끗하고 터질 데 없는 열
큰이모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늦은 시간에 찾은 장례식장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섞여 고인을 추모하며 회한의 한 자리를 달구고 있다. 3일장. 돌아가신 날과 다음 날, 그다음 날 새벽이면 고인의 흔적은 부연 연기가 되어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삶에 지친 우리는 어느 틈에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내 어릴 적 장례에 대한 기억은 곡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이 같이 메는 꽃상여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슬픔에 겨운 사람들의 눈빛과 더불어 만장으로 흩날리던 만국기에 대한 풍경들이다. 곡소리와 꽃상
워킹맘 때 나에게 있어 육아란 먹이고, 재우고, 놀리는 것이었다. 그 외에 뭔가 다른 것을 할 에너지도 없고 아이도 어려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들의 육아를 들여다보니 나는 거의 아이를 방치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하고 있었다. 유치원을 들어가기도 전에 이름도 생소한 많은 사교육을 하고 있었다.나는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어릴 땐 놀아야지, 행복한 아이로 자라면 돼 라고만 생각했던 내 육아가 너무 태평한 소리였나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이 추천하는 교재와 영어 관련 서적들을 우선
오래 전에 읽은 이향봉 스님의 수필에 나오는 말이다. 20년도 넘은 이 말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이 말 속에 담긴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향봉 스님은 시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미움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가르침. 얼핏 눈으로 읽으면 평범한 말인 듯하다.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 이해라는 단어 하나, 용서라는 단어 하나, 정말 우리가 실천하고 사는지 냉정하게 되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래요’ 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미움은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말 속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