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형의 아픔을 처절하게 노래한 시인

자신의 아픔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켜 지금의 우리에게 주옥같은 시들을 전해 준 한하운 시인. 한하운 시인이라 하면 문둥이 시인이라는 것만 알고 있는(그것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지금 앞으로 김포에서 자라나가야 할 우리 지역의 학생들에게 소중한 양식과 김포의 문화 발전을 위한 자양분을 제공해 주기 위해 김포에 잠들고 있는 한하운의 생애를 밝혀 본다.

한하운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은 본명은 태영. 1919년 3월 20일 함경남도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에서 한종규의 2남3년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하운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으로 과거를 3대에 걸쳐 계속해서 급제한 가문으로 함흥 지방에서는 떵떵 울리고 권세 좋게 살던 집안이었다고 한다.

한하운은 함흥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음악과 미술 등 예능 계통에 뛰어난 재주를 보이며 죽 우등생으로 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가 5학년이 되던 1931년 봄, 몸이 무겁게 부어서 아버지를 따라 한 달 남짓 온천과 삼방 약수터를 다니며 요양을 했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나병의 시초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1932년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이리 농림학교에 들어가 수의축산을 공부하게 된다. 이리 농림학교는 입학하기가 매우 어려워 함경남도 전체 19명의 응시자 중 그 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렸다고 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장거리 육상 선수로 활약했다. 선수로 활약하면서도 시의 습작 활동을 시작했다.

농림학교에 다니던 1936년 봄, 몸 전체의 말초부 양역에 콩알 같은 결절이 생기고 궤양이 끝없이 퍼져 나가자 여기저기 진찰을 받다가 서울에 있는 경성대 부속병원에서 나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기다무라 박사는 신경을 만지고 바늘로 피부를 찌르곤 하였다. 진찰이 끝난 뒤에 조용한 방으로 나를 불러놓고 마치 재판장이 죄수에게 말하듯 문둥병이라 하면서 소록도로 가서 치료를 하면 낫는다고 하면서 걱정할 것 없다고 하였다. 나는 뇌성벽력 같은 이 선고에 앞이 캄캄하였다. -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1937년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병이 다소 낫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케이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 남짓 지나면서 다시 병세가 악화되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했다. 열심히 치료에 전념한 결과 병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에 입학했고, <조선축산사>라는 논문을 제출하고 1943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환부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귀국하여 일단 고향으로 간 그는 함남도청 축산과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병은 추위에 견디기 어렵자 남쪽 지방을 지원하여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해 가게 된다.
1945년 봄이 되자 눈썹이 자고나면 빠지고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코먹은 소리를 하게 되었다. 얼굴은 이미 문둥이의 얼굴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병이 악화되자 그는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는 그때부터 두문불출,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남의 이목을 피해 밤에만 다녔다. 전신에 고름이 흐르고 방 안에는 악취가 풍겼다. 그 무렵부터 1948년 월남할 때가지 처절한 투병 생활을 이어갔다. 집 안에 있으며 본명인 태영을 버리고 하운으로 고친 후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이 때 지은 시가 ‘파랑새’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파랑새가 되고자 하는 것은 동경이요 이상이었다. 현실은 지옥이었다. 게다가 8.15 광복은 그에게 이중 삼중의 고통을 안겨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가산을 몽땅 빼앗기자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 노점 책장사를 했다.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의 데모를 구경하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나오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1947년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동생이 체포되자 그도 연루되어 원산 형무소에 끌려가게 됐으나 나병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석방되기도 했다.

1948년 치료를 위해 월남하였으나 나환자인 그는 몸을 쉴 곳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남한 각지를 떠돌며 구걸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러다 서울 명동에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은 시를 팔아 연명하게 되었고 어느덧 명동거리에서 시를 파는 사람으로 유명해졌다.
한하운은 시를 통해 문인들을 사귀게 되었고 1949년 <신천지> 4월호에 한하운의 시 13편이 한꺼번에 실렸다.

여기에 실린 ‘전라도 길 49’는 처절한 생명의 노래요, 높은 리얼리티를 살린 문학이라는 칭송을 받으며 첫 시집 <한하운 시초>가 탄생하게 되었다. <한하운 시초>에 수록된 ‘보리피리’는 그의 대표작으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시가 되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새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며
버드나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꼬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전라도 길49(소록도 가는 길)-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닐리리

-보리피리-

한하운은 1950년  부평에 있는 나환자 정착촌인 성혜원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자치회장에 선임되었고, 1952년 신명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53년에는 대한한센연맹위원회장으로 취임하여 나환자 구제사업을 전개했다. 1959년에는 나병이 음성으로 진단받자 사회에 복귀하여 1966년에는 한국사회복귀협회장을 역임하며 시 창작보다 나환자의 자활과 구제에 힘썼다.

나환자의 자립에 온 힘을 쏟던 한하운은 1975년 3월 2일 인천 십정동 산39번지 자택에서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김포 장릉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하운은 시집 <한하운 시초> <보리피리> <한하운 시전집>을 펴냈고 시집 외에 자서전인 <나의 슬픈 반생기>를 남겼다.

태평양 전쟁의 전세는 일본 본토에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내 몸에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검은 눈썹은 자고 나면 자꾸만 없어진다. 코가 막혀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말은 코먹은 소리다.

거울을 보니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바로 문둥이 그 화상이었다. 기절할 노릇이다. 이곳저곳에서 쑥덕쑥덕한다.

하루는 상사가 부른다. "문둥병이 아닌가?" 빨리 치료를 하라는 것이다. 이제는 그만이다. “세상아, 잘 있거라!”하면서 나는 창황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정말로 문둥이가 된 설움이 가슴을 찢는다. 문둥이 생활로 입학하는 분함과 서러움에 하루 종일 잔디에서 울었다.

이제는 인간 폐업령이 내려졌다. 나는 원한의 피를 토하며 통곡하였다. 몇백 번 고쳐 죽어도 자욱자욱 피맺힌 서러움과 뉘우침이 가득찬 문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란 집안 식구 몇몇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집에 찾아오는 것이 정말로 싫었다. 사람만 온다치면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죽은 것처럼 벽장 속에 가만히 들어가 징역살이를 해야만 했다. 손님이 가기 전까지는 컴컴한 벽장 속에서 하루 종일이고 이틀이고 박혀 있어야 했다.

이럴 때 대소변 보는 일, 숨을 죽이려고 하다가 기침이 나오는 일, 배고픔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 생리의 자연적 욕구가 있을 때에는 정말로 못 배길 일이었다. 이런 고통을 당할 때마다 벽장 속에 숨어 있어야 하는 내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비참해서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컴컴한 벽장 속에서 생리적 배설을 참으면서 짐승같이 혼자서 흐느껴 울기도 하였다. 이 비감은 누구한테 창피해서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다만, 나만 알고 하늘이나 땅이나 알 일이었다.

이러한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나에게 살아야겠다는 용기를 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나는 문학을 통해 이 땅을 아름답게 만들고, 인간의 꿈을 이 땅 위에 행복하게 구현하고 싶었다. 이러한 소망은 내 마음 속에 한 줄기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에 타오르는 문학에 대한 열애는 오히려 영원의 나라에서 사랑으로, 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를 황홀하게 하였다.

비가 그친다. 몇 달이나 계속해서 내리던 장마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갠다. 얼마나 기쁜 일이냐! 나는 무슨 중병을 다 치르고 난 듯 경쾌한 기분이었다. -<나의 슬픈 반생기>에서

김포가 자랑하는 역사적인 인물에는 중봉 조헌 선생을 비롯 장만 장군과 한재 이목 선생, 그리고 대포서원에 모셔져 있는 양성지 선생 등을 꼽을 수 있다.

어느 정도 그 동안의 노력으로 앞에 언급한 분들의 생애와 업적들은 그런 대로 조사가 되어 있고, 그 분들을 기리는 행사도 제법 열리고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인 손돌마저도 무덤이 복원되어 있으며, 손돌이 사망한 날을 기려 해마다 진혼제가 열리고 있다.

그런데 비록 김포와는 살아서는 인연이 없었지만 김포의 자그마한 공동묘지 속 무덤에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한하운 시인을 이제는 수면 위로 끌어내어 우리가 기념해야 한다.

모진 육신의 고통 속에서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내고 말년에는 같은 처지의 환자들의 자활과 구제를 위해 힘쓴 한하운 시인.

화천군 같은 곳에서는 당대의 문객인 이외수 작가를 위해 기념관과 창작실을 제공해 주면서까지 모셔와 화천을 상징하는 작가로 키워내고 있다.

우리 김포도 이제는 한하운 시인을 김포가 자랑할 만한, 기념할 만한 시인으로 대접하고 그의 문학을 기리는 작업을 시작해야 한다.

그의 무덤을 제대로 단장하고, 한하운 시인을 기념하는 청소년 문학제를 열어 그의 시를 다시 한 번 되새겨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김포 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하운 연보>

1919 : 함남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에서 한종규의 2남3년 중 장남으로 출생
1925 : 함흥으로 이사
1926 : 함흥 제일공립보통학교 입학
1931 : 나병 발병
1932 : 이리 농림학교 입학. 수의축산과 전공
1934 : 시와 소설 습작
1936 : 나병 확정 진단
1937 : 이리 농림학교 졸업. 일본 동경 성혜고등학교 입학
1941 : 중국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계 입학
1943 : 북경대학 졸업. 귀국
1944 : 5월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 근무. 가을에 경기도 용인군으로 전근
1945 : 나병이 악화되 관직을 사직. ‘하운’으로 개명
1946 : 함흥 학생데모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남. 모친 사망
1949 : <신천지> 4월호에 시 13편 수록.
       첫 시집 <한하운 시초> 간행
1950 : 부평 소재 나환자 정착촌인 성계원으로 이주. 자치회장에 선임
1952 : 신명보육원 창설, 원장에 취임
1953 : ‘보리피리’ 발표
1955 : 두 번째 시집 <보리피리> 간행
1956 : <한하운 시전집> 간행
1957 :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간행
1960 : 출판사 <무화문화사> 설립
1968 : 간경화증 발병
1973 : 소록도에 시비 건립
1975 : 3월 2일 인천에서 사망.
       김포 장릉 공원묘지에 안장
1977 : 유고시 ‘백목란 꽃’ 외 19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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