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번에는

 

윤제림 

 

또 벌레가 되더라도 책벌레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 책벌레의 몸을 받더라도 책에서는 잠이나 자고

동트거든 나가서 장수벌레나 개똥벌레를 돕고

들어오면 쌀벌레나 좀벌레를 돕겠습니다

책벌레가 되더라도 과식은 하지 않겠습니다

하루에 한 줄

짜고 맵고 쓴 글자만 골라

약으로 먹겠습니다

 

청컨대, 한 번은 누에가 되고 싶습니다

외롭게 자다가, 홀연히

당신 앞에다

녹의홍상 한 벌

꺼내놓으렵니다

무당벌레나 자벌레만 되어도 당신을 위해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곤충도감에서 자야겠습니다

 

시감상

현실이 암울할 때, 혹은 현실이 현실에 지치게 되면 가장 먼저 다음번에는, 다음 생에는, 이런 말을 떠올리게 된다. 다음번, 누구도 증명할 수 없는 말이면서 동시에 누구도 실천할 수 있는 말이다. 시간의 다음이 아닌 결심의 다음번이라면, 그 다음번이 내일이라면 과연 우린 어떤 다음을 기약하며 잠들 것인지? 당신을 위한 다음이 아니라도 좋다. 다만, 나를 위한 다음이라도 좋다. 다음이라는 말은 희망이며 행복이다. 당신은 다음을 꿈꿀 충분한 자격이 있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프로필

충북 제천, 동국대 국문과, 문예 중앙 등단, 시집 <그는 걸어서 온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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