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김포문인협회 회원
풍무동 작당당구장 대표

뭇사람을 판단할 때 두 부류로 나눈다. 부끄러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윤동주(1917-1945)가 육첩방 남의 나라에서 시가 쉽게 쓰여지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처럼 시인 김수영(1921-1968)은 부정한 권력에는 저항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을 수치스러워 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저 왕궁의 음탕에는 한마디 말도 못 꺼내고 50원짜리 갈비에 기름덩어리만 나왔다며 설렁탕집 주인에게나 욕을 퍼부었던 것이다.

<오적>을 쓴 과거 김지하(1941-)는 김수영 시의 풍자가 억압과 통제를 일삼는 지배계층에 가해지지 않고 나약한 소시민과 민중자체에 향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불의한 권력에 저항할 때,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탄압의 총칼에 맞서는 사람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그 뒤를 쫒아가는 이들도 있으며 따라나서진 못하고 행진하는 손길에 주먹밥을 쥐어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 또 많은 누군가는 골방 책상에 머리를 찧어가며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그 날의 역사를 기록할 것이다.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조 섞인 반성과 부끄러운 고백이야말로 그 어떠한 행동보다 영향력이 크다.

아, 나만 부끄러운 게 아니었구나. 그래, 다음엔 더 용기를 내보자. 부끄럼쟁이 동맹. 민중을 연대시키고 권력계층에 끊임없이 죄의식을 자극시켜 변화를 촉구하는 것. 이것이 시의 힘이고 예술의 역할이다. 고개를 우러르니 과연 부끄럼 한 점 감추기 힘든 하늘 높은 계절이다. 그리고 또한 정치의 계절이다. 지도자감이라 하는 사람들이 속속 고개를 쳐든다. 하... 그런데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항상 우리의 몫인가.

 

<구성 :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고문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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