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화해할 시간입니다 제2회

민경철 교장선생님 정년 퇴임 기념사진

6. 25 때 저는 열 살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조리로는 인민군이 안 들어왔어요. 저쪽 용강리와 대곶면으로 해서 김포공항까지 갔지요. 대신 여기는 북쪽 내무성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강제로 부역시킨 사람들이 좀 있었지요. 면사무소에서 일하던 사람이나 동네 일을 보던 구장에게 대한민국 치하에 하던 일을 인민공화국의 관점에서 시킨 것이지요. 몇 달 뒤 국군이 들어와 수복되자 경찰과 치안대에서 부역자들을 붙잡아가서 처단했지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도 안타깝지만, 그 후손들도 ‘빨갱이 가족’이라고 손가락질당했어요. 경찰하고 보안대 사람들은 줄기차게 감시하고요. 저의 집은 부농에다 아버지가 학식이 있어 구장을 보았어요. 두 분의 형님은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아버지, 작은아버지가 수복 후에 부역자로 몰려 재판도 없이 학살당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셋째 형도 폭격에 돌아갔습니다. 강제로 의용군에 끌려간 경욱이 형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었습니다. 귀향했는데 다시 국군에 징집되어 군대에 갔어요. 집안이 이렇게 되니 저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농사를 지어야 했어요. 군대에 간 경욱이 형이 뒤늦게 알고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내 학교를 3년 늦게 다니게 되었지요. 김포농고 다닐 때 반공대회가 열리면 제가 공산당을 성토해야 했고, 친구들이 ‘빨갱이’를 입에 올릴 때는 침묵해야 했지요. 중학교 진학은 늦었지만, 무난히 대학까지 진학해서 법대에 다녔어요. 그런데 4학년 2학기 때 법무부 서기보를 지원했지만, 신원조회로 낙방했습니다. 내 앞길이 앞으로도 캄캄할 것이라는 좌절감에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얼마 뒤 교육자는 연좌제에 걸리지 않는다고 해서 초등학교 교원이 되었습니다. 직업을 갖자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고 혼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내도 아버지, 큰아버지, 오빠 등 여섯 명이 월북했고 조부모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 가족이라는 죄 아닌 죄로 학살당했다고 해요. 처지가 같은지라 서로 위로가 되더군요. 결혼할 때는 옹진군 연평 초등학교 교사였어요. 당초 계획은 예식장에서 식이 끝나면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욱이 형이 종갓집 아들인데 집안 잔치를 벌이자고 해서 계획을 바꿔 첫날밤을 형의 집에서 보내기로 한 것이에요. 잔치가 끝나고 술에 잔뜩 취해 자고 있는데 불청객이 들이닥친 거예요.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누가 권총을 가슴에 들이대요. 중정 요원이었지요. 지금은 국정원이라고 부르는 곳 말이에요. 나를 방으로 다시 밀어 넣고는 형을 붙잡아 갔어요. 날이 밝자 동내가 난리가 났죠. 다른 친척 두 명도 같이 붙잡혀 간 거예요. 영문을 모르는 나는 시커멓게 타는 마음으로 감정동 처가로 갔지요. 밤사이에 벌어진 일을 모르는 신부댁에서는 우리에게 덕담을 건네며 맞이했지요. 나는 속이 탔지만, 겉으로는 웃어야 했어요. 동네 청년들은 새신랑이라고 거꾸로 매달고 발바닥을 때리며 술판도 벌이고요. 그래도 내색도 못했답니다.

김포를 떠나 학교가 있는 연평도로 배를 타고 가는 신혼부부 마음이 편하겠어요? 신혼이라는 게 세상에 하나뿐인 좋은 시절인데 불안과 공포로 얼룩졌어요. 일주일 후에는 형수까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월북했던 숙부가 내려와 형에게 돈과 무전기를 주고 간첩행위를 강요했던 거예요. 완강히 거부하자 다시 나타나지 않았는데 십 년 후에 발각된 거죠. 땅에 파묻었던 무전기가 간첩 증거가 된 거예요. 왜 많고 많은 날을 놔두고 혼인식 날 붙잡으러 왔을까 생각해보니 그날은 경사라 일가친척이 다 모이잖아요. 그러니까 중정에서 이미 뒷조사를 마치고 일망타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거예요.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에요. 중앙정보부에서는 고문으로 허위 간첩활동을 자백한 형은 모범수로 있어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8년 동안 옥살이를 했어요.

첫날밤에 들이닥친 공포는 그 뒤로 계속되었어요. 아내도 시아주버니가 간첩으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으니 그때가 떠올랐겠지요. 어느 날 밤 연평도 초등학교 사택에서 시커먼 그림자와 마주쳤답니다. 같은 사택에 사는 여선생을 자기나 남편을 잡으러 온 요원인줄 잘못 알고 엉덩방아를 찧은 바람에 유산까지 했어요. 저도 그 뒤로도 계속 불이익을 받았는데 좀처럼 ‘빨갱이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떨어지지 않았어요. 수시로 근무하는 학교로 정보부와 경찰이 찾아와 신원조회를 하고 사진 촬영까지 하더군요. 전두환 정권 때 연좌제 폐지 이후에도 몰래 경찰이 찾아와 동정을 살피자 화가 솟구쳐 남산의 안기부로 찾아가 항의했어요. 알고 싶은 것 있으면 다 말하겠으니 몰래 사찰하지 말라고요. 그제야 겨우 괴롭힘을 끝낼 수 있었어요. 제 나이 환갑 즈음까지 불행했던 집안사는 입 밖에 내지 못했어요. 18년의 옥고를 치르고 나온 형과 형수님은 돌아가셨습니다. 얼마 전에 과거사 위원회에서 알게 된 조사관의 권유로 간첩혐의에 대한 재심 신청을 했습니다.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을 인정받아 형의 억울한 죄를 벗겼고 조카들은 배상금을 받았습니다. 첫날밤에 들이닥친 민씨 집안의 불행이 지금에서야 겨우 끝난 거예요. 아버지와 숙부가 돌아가신 장소를 몰랐는데 태산테마파크 개발할 때 발견되었습니다. 그 당시 약 50여 명이 처형되었는데 유족 9명이 뜻을 모아 묘를 조성하고 매년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진상도 밝혀졌고 보상도 받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오래 묵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입니다. 가해자나 그 후손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때 공권력에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분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70년 세월이 지났으니 서로 만나 그 당시의 이야기를 듣고 사과하고 용서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 위령제의 변경된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유족들만 참석해 진행될 예정입니다

일시 - 2021년 10월 30일(토)
장소 - 하성 태산공원 희생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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