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몽실학교는 아동·청소년 즉, 우리들만의 공간이다. 청소년의 고민은 참 다양하다. 그중 대

부분은 친구에서 시작한다. 친구는 꼭 나이 또는 학년이 같은 또래 집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다. 친구는 선배가 될 수도 있고, 후배가 될 수도 있고, 성별이 다를 수도 있고, 꼭 사람이 아

닐 수도 있다. 또한 공간도 학교 안, 학교 밖, 우리 동네, 남의 동네 또는 지구별 곳곳이 될 수

도 있다. 그런데 이 다른 조건들은 때로는 다름의 기준이 되기도 하고, 차별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나이가 다른 세 명의 청소년은 많이 무겁지만 절대 미뤄둘 수 없는 주제인 ‘혐오’를 나누었다.

 

Q. 나에게 혐오란?

A. 박영우: 혐오, 표현. 나에게 표현이란 서로의 감정을 알 수 있는 신호등이다.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큰 방법이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행복, 기쁨, 감사함’ 같이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짜증나는, 화난, 질투 나는’과 같이 부정적인 것도 포함하는 복잡한 사람들의 느낌이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사람들은 혐오라는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그 혐오라는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극도로 혐오’라는 뜻의 ‘극혐’이라는 줄임말이 있다. 또 ‘너 정말 못생겼다’와 같이 외모평가, ‘여자답게 조용히 좀 해’와 같이 차별이 사용된 말 등등이 있다. 혐오라는 감정은 매우 다양하다. 지금 우리가 이 기사에서 이야기할 ’혐오표현‘은 일상에서 아무 생각 없

이 쓰는 차별이다.

 

김다옴: 어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온라인 공간은 청소년에게 ‘절대적 세상’이 되었다. 세상에 흘러넘치는 육체적인 폭력과 혐오는 이제 공간을 넘어 얼굴 없는 가해로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섬뜩한 칼날로 작동한다. ‘표현의 자유’는 때로는 누군가에게 어마무시한 화살촉으로 개인의 삶을 죽음의 공포까지 이르게 한다. 혐오의 속내는 차별이다.

 

차예나: 혐오는 멈출 수 없다. 하나의 대상을 혐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혐오는 다른 대상을 혐오하는 근거가 된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장난스럽게 주고받는 혐오표현’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이다.

 

Q. 우리가 만난 혐오란?

A. 박영우: ‘나 결정장애 있어서 잘 못 고르겠어’, ‘결정장애’란 일상에서 잘 사용되는 혐오표현이다. ‘결정장애’라는 말이 없음에도 결정을 하지 못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결정’과 ‘장애’라는 말을 합쳤다. 또 ‘너 진짜 혐오스러워’ 라는 말을 그저 ‘장난’으로 주고받는 상황들이 빈번히 있다. 이미 이런 ‘혐오표현’들이 스며든 시대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이런 말들을 생각 없이 주고받는다. 또 학교에서 쓰던 말을 인터넷 세상에도 가져온다. 이렇게 인터넷에서는 하나의 ‘혐오표현’이 끊임없이 퍼져나간다. 이렇게 퍼져나간 혐오표현 중에는 급식을 먹는 학생들을 비하하는 ‘급식충’과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잼민이’ 등과 같은 표현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혐오표현을 어디서나 자주 만날 수 있다.

 

김다옴: #짧은 머리의 여성 #긴 머리의 남성 #외모 #○○다운 #어른 #아이 #노인 #청년 #장

애 #성별 #성적 #학력 #학벌 #완장 #경제력 #지역성 #국적 #인종 #사람 #동물 #빨강색 #

파랑색... 숨이 턱 막힌다!

그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누구나 차별과 혐오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어

찌 되었든 우리는 모두 관련자이다.

 

차예나: 혐오표현은 일상에 녹아있어 눈치 채기 힘들다. 특히 청소년에게는 유행어가 됐다.

청소년은 혐오표현을 특정 대상에 혐오감을 느껴 사용하기보다 장난스럽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팀에서도 ‘혐오표현인 줄 모르고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경험’을 가진 청소년이 있었다. 이는 청소년들이 SNS로 쉽게 혐오표현을 접한다는 점, 이를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해서 사용한다는 점과 연관이 있다.

 

 

Q. 우리가 할 수 있는 혐오에 대한 대처는?

A. 박영우: 혐오표현을 받은 사람만 괜찮으면 괜찮다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혐오표현’을 의미 없이 주고받는 상황을 괜찮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을 이 기사에서 쓴 이유도 이중적인 사회와 정반대인 우리의 도덕성,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다. 이미 사회는 매우 모순적으로 변했고 이 글을 쓰며 그 사회에 착한 변화를 바란다.

 

김다옴: 답은 아주 간단하다. 생명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생존법으로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비난하고 헐뜯는다. 인간은 순서를 지키는데 익숙하지 않다. 몇 초의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신호등 위의 아이를 스치며 ‘불법 우회전’을 서슴지 않는다. 그 순간 어른은 아이에 대한 존중을 버렸다. 사람이 규정한 행복 안에는 ‘나’ 시점의 행복만 존재한다. 모두가 모두로부터 배우는 '낯설게 보기'는 아주 오래된 진리이다.

 

차예나: 혐오는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유행어처럼 사용하는 혐

오표현은 거꾸로 청소년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혐오와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혐오표현을 ‘일상적으로 장난스럽게 사용하는

현상’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세 명의 청소년이 끝도 없는 토론에 토론을 이어가고 이어가서 겨우겨우 중간 마침표를 찍었다. 허나 우리는 살아가는 내내 이 사나운 고민을 계속 맞닥뜨릴 것이다.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고 용감하게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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