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명예교수

19세기 말에 미국에서 태어난 엘리엇은 영국으로 이주를 해서 시인이 된다. 그는 양차대전을 거친 유럽의 정신적 황폐함을 보면서 그 유명한 <황무지>라는 시를 써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황무지>의 첫 주제인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그는 노래한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무딘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잘 잊게 해주는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주었다.’ 이것은 4월에 북반부에 속한 유럽의 봄 정경을 엘리엇이 자신의 정서를 가미해서 읊은 시다.

여기에서 잔인하다는 것은 황무지 같은 대지 위에서 생명의 활동이 보이지 않는 황폐함 자체를 일차적으로 진술한 정서이다. 봄은 왔지만 아직 동식물이 활동하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환경을 기가 막혀 바라본 감회인 것이다. 여기에서 욕망하는 여름은 풍성하고 화려한 절기이다. 두 번째로 잔인함은 이런 화려한 여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대지는 죽은 자와 같은 4월의 이 황량함을 치열하게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상한 의지의 표현이다. 이중적 은유로서의 이런 잔인함이 어쩌면 엘리엇이 상정한 더 핍절한 요구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코로나 사태는 중국과 한국을 필두로 전 세계를 황폐화시켰다. 그렇게 만병을 통치한 것 같았던 의료기술로도 호흡기 질병 하나를 퇴치하지 못하고, 병원균을 피하는 수동적 행동만 외치며 사람들은 허둥지둥하고 있다. 황량한 4월이 지나면 무성한 녹음의 5월이 오듯, 그저 대유행의 끝이 저절로 오기만을 손 놓고 기다려야 하는가. 자연은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안일한 방식으로 수용한다면, 자연스러움 속에 숨겨진 치열함을 놓치게 된다. 마치 물 위를 헤엄치는 오리의 바쁜 물 갈퀴질을 놓치면 오리는 으레 물위에 떠 있는 동물이라고 오해하듯이. 코로나 사태는 지금 우리가 겁먹고 대처하는 방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어느날 갑자기 끝날 수도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광우병 소동 때처럼 순식간에‘ 마스크’를 벗어던지고 구태의연하게 안일한 감염에 무관심한 삶을 살 것이다. 메르스, 신종플루, 에볼라, 코로나는 무엇이 달랐던가? 한 번 닥친 감염에 대한 잔인한 이별이 없었기에 올 때마다 허둥대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게 된 것이다. 박쥐 한 마리에 대한 치열한 파악이 없었기에 놓친 감염인데도. 앞으로 변장한 코로나가 불원간 들이닥칠 것이다. 이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낼 저 4월의 잔인함을 지켜내야 우리는 건강해질 수 있다.

한국의 정치에도 4월의 잔인함은 있었다. 대한민국의 초대 정치가 부패로 치달을 때 학생들은 황량한 황무지에 새로운 의지를 품고 1960년 4월 19일 분연히 일어났다. 거짓과 부정부패를 단호히 거부한 젊은이들은 2월에 대구에서, 4월에 서울에서 이어진 자유를 위한 외침을 봄비 삼아 민주주의의 여름을 욕구하였다.

이듬해 일어난 군사혁명에 주도권이 빼앗겼으나 순수한 4월의 외침은 한국의 민주주의 열차를 출발시켰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정치는 4월의 잔인함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줄곧 경제, 사회, 지성 그리고 문화에 대해서는 항상 오뉴월 찬 서리만 뿌리며 왕성한 여름으로의 진입을 막는 애물단지로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상식과 염치, 합법과 절차를 입에 달고사는 정치인들이 비상식과 몰염치, 탈법과 무질서를 스스럼없이 자행하는 일은 국민소득 100 불대의 과거와 30,000 불이 넘는 현재에도 다르지 않다. 개발독재의 향수 달래기로 기득권을 누려온 수구파의 작태가 한심했다면, 그것을 배척코자 집권한 진보파가 권력에 취해 온갖 반칙과 배신을 거리낌 없이 자행하는 꼴은 아직도 한국이 정치적 황무지임을 말없이 웅변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황무지에 살 수 없다. 이런 과거적 모습을 걷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시도하여야 한다. 4월 19일이 독재를 무너뜨려 과거와 결별하였듯이, 오는 4월 15일은 새로운 5월의 녹음을 향한 욕망을 뒤섞어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잔인함을 드러내야 다. 온갖 기존의 감염원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나야 한다. 이번 4월은 정말로 잔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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