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지만
前 김포문화원장

조강1리(선암동)

① 땅이름 :

조강(祖江)이라는 땅이름은 기록상으로는 1454년(단종 2;甲戌)에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 통진현의 기사에 “조강은 현의 북에 있다. 나루가 있고 황대어가 나는데 다른 곳에는 없다. 선덕연간(1426년~1435년)에 중국왕의 명으로 황대어를 구하러 사신이 왔었다.(祖江在縣北有渡船産黃魚大他所無宣德年中中使帝命求)”는 기록에 처음 조강이란 지명이 나타나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세종실록>이 편찬된 1454년 보다 더 앞선 시기인 선덕여왕 재임 중에 ‘조강’이라는 지명은 이미 존재하였고, 1163년에 태어나서 1241년에 사망한 고려 말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의 시 ‘조강부(祖江賦)’ 나 1260년에 태어나 1330년경(?) 사망한 고려 후기 충혜왕 때 찬성사를 지낸 백운항(白元恒)의 시 ‘행조강유작(行祖江有作)‘ 등에서 보듯이 일찍이 조강이라는 지명이 나타고 있다.

1789년(정조 13;己酉)에 작성한 <호구총수>에는 통진부 월여곶면 조강리와 울내리(右乙內里) 두 마을이 기록되어 있다.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두 개 마을을 합쳐서 월곶면 조강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내리(右乙內里)는 ‘울타리와 같이 산이 둘러 싼 마을’이란 뜻으로 땅의 생김새대로 불리던 ‘울안에 있는 마을’이 ‘울안이’가 되었고 한자가 유입되면서 한문으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우리땅이름이 전혀 다른 의미의 땅이름인 ‘右乙內里’가 된 것이다.

1993년에 발간한 <김포군지>에 지명전설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수록하고 있다. 옛 날 한양의 부잣집 아들 삼형제가 이곳에 기와집을 짓고 살면서 큰 울타리를 쳤는데 울타리가 없어진 지금까지 울안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② 선암동(仙岩洞) :

태봉산 북쪽 산기슭에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거석신앙(巨石信仰)으로 남근(男根)을 상징하기 때문에 옛 날에는 아녀자들이 선바위 앞에서 다산(多産)과 득남을 기원했다. 서 있는 바위란 뜻인데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신선‘仙’자를 써서 성스러운 ‘신선한 바위’가 되어 거석신앙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하겠다. 선바위가 있는 마을이 선암동이 된 것이다.

 

③ 태봉산(胎峰山) :

중종과 문정왕후 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순공주(1542~1545)의 태실이 있었던 산으로 토석채취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강2리

 

① 땅이름 :

아마도 조강리(祖江里)라는 땅이름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머머루섬의 서쪽 끝까지 사이의 강을 조강(祖江)이라 부른데서 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1454년(단종 2;甲戌)에 편찬한 <세종실록> 지리지 통진현의 기사에 “조강은 현의 북에 있다. 나루가 있고 황대어가 나는데 다른 곳에는 없다. 선덕연간(1426년~1435년)에 중국왕의 명으로 황대어를 구하러 사신이 왔었다”는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이 편찬된 1454년 보다 더 앞선 시기인 선덕여왕 보위기간이 1425년에서 1435년 까지 인 점을 감안하면 1435년 훨씬 이전부터 조강이라는 땅이름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조강은 한강과 임진강이 할아버지처럼 그 세(勢)를 다 하여 서로 만나 할아버지 강인 큰 강을 만들어 서해로 들어간다 하여 조강(祖江)이라는 땅이름이 생긴 것 같다. 반면 조강의 ‘조’자를 ‘조수 조’인 潮江으로 부르기도 한다.

조강2리는 원래 조강포구마을에 살던 주민들이 6·25 한국전쟁을 겪고 나서 1953년 7월 휴전 후 한강하구 뱃길이 막히고 군사작전지가 됨에 따라 정부가 70여 가구를 강제로 퇴거시켜 난민수용소처럼 세어지게 된 자국민 ‘디아스포라’의 아픈 추억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마음고생을 하면서 사는 주민이 많다.

 

② 조강나루(祖江津) :

조강포구에는 조강원이라는 관영 숙박업소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포구의 규모가 아주 컸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조강진은 한강하구의 수운의 중심지였고 물류의 거점이었다. 고려조에는 세곡이 조강을 거쳐 송도로 운반되었고 조선조에는 전라·충청·경상도 등 삼남의 세곡을 실은 조선들이 염하를 거쳐 조강진에서 정박한 후 물때를 맞추어 운항해야만 했기 때문에 항상 포구에는 물화가 넘쳐 나고 사람의 왕래가 많아졌으며 자연히 장시(場市)가 열리게 되었다. 특히 조강은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지역이어서 물고기의 맛이 좋아 어업에 종사하는 어민도 많아서 어항(漁港)의 기능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퇴적물로 한강하구의 하상이 높아지자 한강상류 쪽으로 운항하는 소형선박들의 해운업이 발달했고 선주들의 경제력이 큰 세력으로 등장하여 상권을 장악했다.

 

③ 조강물참(祖江潮汐) :

고려 때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조강과 연관되는 시를 많이 지었으며 특히 조수간만의 차가 10m가 넘는 조강의 물때를 잘 알지 못하여 해난사고를 당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고자 축일조석시(逐日潮汐詩)를 지어 사공들이 외우도록 하였다.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를 1주기로 하여 16일부터 그믐까지 되풀이 된다는 것이다. 즉, “사흘은 토끼 때 / 사흘은 용 때 / 사흘은 뱀 때 / 하루는 말 때 /

양 때도 세 번 / 잔나비 때도 두 번인데 / 달이 기운 후에도 다시 이와 같도다.“

다시 풀이하면

1일에서 3일 까지 3일간은 상오 5시에서 7시 사이 [卯時:토끼]에 들고

4일에서 6일 까지 3일간은 7시에서 9시 사이 [辰時:용]에 들고

7일에서 9일 까지 3일간은 9시에서 11시 사이 [巳時:뱀]에 들고

10일 하루는 11시에서 하오 1시 사이 [午時:말]에 들고

11일에서 13일 까지 3일간은 하오 1시에서 3시 사이 {未時:양]에 들고

14일에서 15일 까지 2일간은 하오 3시에서 5시 사이 [申時:잔나비]에 든다.

 

④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1517~1578)

토정 이지함은 쑥갓머리산에 움막을 짓고 조강에 수표를 세워 조수의 간만의 차를 달의 운행과 함께 연구 조사하여 조강물참시각표를 만들었다. 지금도 우리는 토정이 작성한 물때시간표를 쓰고 있다.

 

⑤ 옛 조강리 이장 故정원석 옹 이야기, 조강기생 이야기, 당산 등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