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옥 作

봄엔 다 그래요

 

우리 집 자(尺)들이 조금씩 자랐어요

그만큼 세상의 길이들은 줄었겠지요

의자들은 부풀고요 치마들은 뚱뚱해졌어요

언니들은 뒷굽을 조심해야 해요

평지들이 뒤뚱거리니까요

 

봄엔 다 그래요

할머니는 초록 머리카락이 새로 나고

흔들리던 이빨은 모두

새로운 뿌리가 생겨 단단해졌대요

지친 아지랑이가

노인의 이마에 와서 눕고요

삼각 혹은 길쭉한 씨앗도 모두

동그란 열매를 생각한대요

 

나도 새로운 말투로 말 몇 개를 바꿔야겠어요

말은 관계들 사이를 헐렁하게 풀어놓고요

이름마다 보풀이 일어나요

저녁이 되면 전등이 저벅저벅 걸어와요

조심해, 그건 넘어지는 방법이야

새로운 말투로 알려주고 싶어요

 

봄의 모서리가 줄어들면

태양은 더 둥굴어지고

밤은 착한 마음씨처럼 훈훈해져요

창문은 문틈에 푸른 귀를 매달아요

다 자란 삼각자는 삼각을 낭비하고요

줄자는 길이를 낭비해요

그건 헤픈 것이 아니래요

길이를, 사이를 줄이려는 거래요

봄엔 다 그렇대요

 

비치발리볼

 

수박줄기들은 백 개도 넘는 비치발리볼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입속의 바람을 다 불어 넣으면

쏙 꼭지를 밀어 넣던 그 비치발리볼처럼

꼭지를 물고 늦여름을 불어넣고 있다

 

주고받는 것이나 던지는 놀이에는

흘리거나 놓치는 것들이 있다

더 깊은 쪽으로 둥둥 떠가던 비치발리볼들

즐거운 한때는 어쩌다가 해류를 타고 지구를 돌아

몇 년 후 어느 해변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수박과 비치발리볼은

가볍거나 혹은 무거운 것으로

제각기 다른 속을 채우고 있다

통통 두드리는 것으로 속을 묻는 의사타진

수박은 두꺼운 껍질에 바람이 들어 있고

비치발리볼은 주고받는 놀이에

바람이 가득 들어 있다

 

비치발리볼이 지구를 돌아서 다시 연안으로 오는 사이 수박들은 줄기를 타고 우주정거장인양 꽃을 피우고 몇 통의 푸른 별, 지구처럼 익어간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오는 동안

비치발리볼은 얼마만큼의 공기를 소진했을까

그 한 호흡을 잃어버리는 순간,

수박은 몇 톨의 씨앗만 남기고 블랙홀 속으로 잠적한다

 

수박과 비치발리볼

폭락 할 때도 있지만 둘 다

여름을 배경으로 한 놀이와 상실의 목록이다

 

가웃

 

곡식 한 되.

 

그 반을 일컬어 가웃이라고 한다.

정확한 양보다 살짝 웃도는 그 분량

그것은 저울의 마음이 아니고 눈금도 아니다

눈대중으로 통하는 양과 길이의 단위

그 말에는 엄마가 들어있다

 

반은 명확하지 않거나

늘 모자라는 말이다

사람에게 반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이때 분별은 잊어도 좋다

그건 사후의 일이기도 해서 반은 과거일 때가 많다

알고 보면 참 외로운 단위

자주 외면 받는 반(半)에게 홀수는 없다

반에서는 덜어내는 일보다

채우는 일이 더 쉽다

 

단추들은 다 옷의 반

그 지점에 있다

지퍼들도,

반이 없으면 온전함이란 늘 풀린 앞섶 같을 것이다

 

가웃이라는 말

그 안에는 너무 가볍거나 무겁지 않은

인심 좋은 난전의 잡곡들이 있다

 

얼룩말 로프

 

뒷발질 사나운

흰 줄과 검은 줄을 생산해 내는 공장 같은,

초원에 칭칭 동여매져 있는

길고 짧은 얼룩말들

말에 묶인 줄을 다 풀면

세상에 묶지 못할 것이 없다

 

어쩌다 저렇게 꽁꽁 묶인 종(種)이 되었을까

 

견고한 로프, 뒷발을 차며 날뛰어도 맹수에 쫒기며 사력을 다해도 풀어지지 않는 질긴 줄처럼 생명이란 단단하게 매어진 결박 같은 것일까

 

로프를 감아놓은 뭉치들

사과를 깎을 때 풀려나오던 그 줄처럼

묶인 매듭과 풀릴 매듭이

한곳에 있다

 

흰줄과 검은 줄 사이엔 탱탱한 결박이 있을 뿐 사실 저 두 가지 색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미루고 있거나 텅 비어 있는 중 일지도 모른다

 

세시 방향으로 풀린 하루를 감는

또는 어디선가 뚝 끊긴 자투리 길이들

누군가 로프공장 창업을 계획 중이라면

저 얼룩말에게 상담해 보면 되겠다.

 

기다리는 무게

 

소읍의 터미널엔

긴 음식을 짧게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돌돌말린 김밥처럼 한 번에 빨리 말린

한 사람의 주검을 떠나보냈다

부르르 떠는 여진을 남겨두고 떠난 버스

버스의 행선지는 스무 곳 남짓

오늘 떠난 사람은 저곳들 중 어디로 갔을까

반질반질한 평상에 앉아 버스를 기다린다

무수한 무게들이 앉았다간

천지간 같이 가벼운 평상

기다린, 기다리는 무게가 앉았다 갔을 평상

기다림과 기다림 사이 겹겹의 시간

짧은 틈은 본디 매끄럽거나 부드럽다

유연하고 빛나는 닳고 닳은 표면이

미끄러운 수면 같다

기다림도 오래 쌓이면 저렇게

반들반들하다

 

미끄러운 평상의 내면

이제는 그 누구도 앉지 못하는 빙판 같은

한 겹도 아니고 수억 겹 덧씌워진

잠깐의 배차 시간들

오래 앉아 있을 시간은 없었지만

차표를 든 시간이 분초로 날아간다.

한 마리 나비처럼,

멀미나는 봄날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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