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나 作

꽃은 뱀을 몰고 온다

 

꽃은 뱀을 몰고 온다고 하였다

그때 나무는 아득히 묻힌 땅 속의 긴 폭풍을 가지고 왔다

소용돌이치면서 피어나는 것은

 

꽃이 아니라 꽃살문에 비치는 햇볕

 

흙 속에 허물을 길게 벗어두고 튀어 오르는 뱀을,

우리는 구불거리는 나무라고 불렀는데

가지 끝에 매달린 그늘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데

 

나무는 두근거리는 비늘을 안은 채

대가리로 공기와 흙을 밀어낸다, 그때

꽃은 독을 질질 흘리고

입에선 한 점 봄이 질질 새어나오고

 

툭 불거진 뱀을 보고

그만 발자국은 꽃잎을 밟고 혼비백산,

산안개 자욱했던 봄도

발이 달려있는지

발톱만큼, 개미걸음만큼

꽃이 비늘을 몰고 오듯이

걷고 있었다

꽃을 먹는 것들이 사는 마을

지붕 너머 쓰러진 사람들 두고

불쑥 떠오른 구름인 줄 알고

딴청 피우듯이 새소리를 찔러 넣고 다녔다

 

오후 5시의 웅덩이

 

웅덩이는 무엇이든 잘 받아둔다

황태를 거두러 가는 고모부가 말했다

 

한낮을 가두는 달의 뱃구레가 커져간다

부둣가에 줄지어 매달린 황태, 사실

말라가는 게 아니라 웅덩이를 키우고 있다

 

웅덩이는 소금 바람을 가두는 중이다

주섬주섬 눈발도 담고 있는 중이다

쪽쪽, 입을 가진 웅덩이, 아가미가 크다

 

하늘과 가까워지는 웅덩이 뒤꽁무니,

새까맣게 반짝인다 아직 황금이 되지 못한 까닭

 

공기를 다져 밀봉시키는 비행법을 몸에 숨긴

저 황태들,

팽팽하게 고인 살가죽, 웅덩이들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다 다만 오래 다문

침묵만이 모든 소리로 몸을 바꾼다는 것

 

강우량 따라 맛이 달라지는 저 웅덩이

하루하루 수장되는 길이 오후 5시에 멈춘다

미시령에서는 황태를 웅덩이라 불린다

 

제기동 인디언

 

나는 인간과 숲의 사이에서 태어났어요

어둠이 토해낸 빛은 유난히도 밝아서 달이 되지요

 

오늘은 비둘기의 춤을 뽑아 머리에 꿰고

구름은 아직 빗소리로 풀리지 않았다고

점을 치지요

 

함부로 하늘을 베어버린 가로수들

웅덩이에 고인 물빛 모양을 닮아가지요

코끼리처럼 우는 능소화, 붉게 넝쿨을 치나봐요

태양을 깨고 나온 새는 아직 날개를 펴지 못해요

 

팔자주름은 검붉은 것들 앞에서 잘 보여요

인간도 아니라는 말에 쉽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오후예요

나는 하늘에서 추방된 소낙비,

명랑한 웅덩이의 후손이면서

쾌활을 부수는 바퀴이기도 해요

 

엄마, 나는 제기동 재개발 단지에서 태어난

인디언이래요

나의 운명은 불새에게 떨어진 머리카락이라는데

여기는, 오래된 지팡이들만 가득해요

시멘트 계단이 달의 심장과 가까워지는 동네

폐지전쟁이 매일 아침 반복되지만

우유배달 오토바이소리 새삼 빛나지만

오늘은 갑작스레 능소화 꽃비가 오잖아요

그러니 인디언이란 골목을 파헤치지 마세요

물잠자리 한 쌍 다시 하나가 되었다가

둘이 되었다가 맨발로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네요

 

시인의 책상

 

책상은 연못이오

새벽 기도 하러들어오는 손들은 아직 차갑소

저 연꽃성당, 붉은 십자가 빛이 드오

십자가에 박힌 것은 새벽

예수를 끌어안은 눈빛으로

새벽이슬 거두고 들어오는 뿔테안경이 있소

소매로 닦아놓은 달은 지워지는 법이 없다오

그렇게 나를 책상에 올려두었소

 

연못은 무른 뼈와 살가죽을 내려놓고

잉어만 남은 어떤 새벽을 책꽂이에 걸어두었소

새벽미사였소

오늘은 여인의 몸 하나

호수와 새를 임신하였다는 풍문을 들었소

책상 쪽으로 잠드는 성호,

흠뻑 젖은 종이에는 지느러미 냄새만 가득하였소

 

묵주반지 굴러드는 쪽, 어스름이 파도치고

미사보 고뇌를 모아 연꽃은 피어나고 있었소

시의 천장을 둥글게 높이고

수련을 그렸던 어느 화가가 생각났던 것이오

 

세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발자국,

책상에 가득하오

축축한 고해성사를 연잎에 받아 적어놓았으니

그때, 4B연필 속에서 피를 가진 자들이 걸어 나왔소

 

바위가 사는 법

 

바위는 제 몸피를 기억하지 못했다

장미 문신,

꽃 알레르기와 당뇨를 앓는 바위

돌나물과 찔레넝쿨이 휘감아도 죽지 않는 바위

새벽이 어스름으로 개칠을 해도 죽지 않는 바위

비가 와도 천둥이 내리쳐도 갈라지지 않는 바위

 

나의 바위는 트럭운전사

국도에서 잠을 짜고

고속도로에서 고비를 넘기는 바위

사각팬티 하나로 일주일을 견디는 바위

속옷과 양말을 갈아 신을 시간이 없는 바위

 

그러나 정오의 희망곡만은 꼭 듣는 바위

라디오와 강산에의 <...라구요>가 한창인데

꽃구경 한번 해볼 만도 한데

바위는 속도마저 화석으로 가두는 걸까

석불의 심장도 아니면서

귓불만 늘어지는 바위

단단함은 옛 이야기일 뿐이라는데

 

모처럼 집에 온 바위

안방에 드러눕고서야 이목구비가 보인다

비집고 들어갈 몸이 보인다

 

뱃살이 틀어막고 있는 바위

남풍을 품고 돌아왔으리라

바닥으로 기울어져있는 한철이 가는 동안

바위는 나를 밟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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