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년 作

기차가 통과예령을 울리며 간이역을 지나간다. 역사 앞 수숫대는 구름을 쓸고 묵은 닭들은 하릴없이 구구댄다. 나도 하릴없이 하루를 전세 내어 역사벤치에 앉아있다. 기차는 떠났지만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기적의 공명음은 참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 어쩌면 저 기차는 지금 백 년째 가을을 지나가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가장 오래 달려 온 민족의 마라토너가 아닐까도 싶다. 백여 년 전, 제물포에서 첫 울음을 터트린 후 격동의 한 세기를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말이다. 기차는 한때 우리 삶의 일부분이었다. 모두가 철길 따라 흘러왔고 철길 따라 흘러갔다. 기적소리에 희로애락을 싣고 고단한 삶의 등고선을 넘어왔다. 그래서 기적소리에는 그 시대의 애환이 짙게 묻어있다.

일제 때의 기적소리는 상실의 비애감을 담고 있다. ‘모갈형’ 증기기관차의 기적소리는 먹이를 찾는 짐승의 울부짖음을 닮았다. 꽤액, 꽥, 괴성을 지르며 검은 연기를 풀어헤치고 미명의 들판을 달렸다. 사람들은 이 거대한 괴물을 보고 환호하면서도 일말 불안해했다. 개화와 침탈이란 양면성을 안고 출발했기 때문이다. 기차는 곧장 수탈의 들판을 달렸다. 산을 잘라먹고 군량미를 적재했다. 부산항으로 서울역으로 보따리 같은 생들을 부리며 캄캄한 노역의 밤을 건넜다. 징용과 유랑의 눈빛들을 싣고 남만주국경을 달리거나 어린소녀들을 사할린이나 남양군도에 부려놓았다.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소녀들은 먼 타국의 골짝에서 망향의 혼魂으로 울기도 했다. 이때는 집으로 돌아가는 노스탤지어의 기적소리는 원경으로 보는 낭만이었다.

전쟁시기의 기적소리는 단장斷腸의 울음처럼 절절했다. 뽀옥, 눈 덮인 전선을 달리는 ‘미카3’의 기적소리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끓인다. 전장에 울리는 진혼곡처럼 허공을 가르는 기적의 공명음이 목쉰 듯 길고 여리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여리면서도 강하다. 미카3은 수송전사였다. 피난열차로 남진을 하고 국군을 싣고 포연 자욱한 북녘 땅을 휘몰아쳐갔다. 때론 구출작전에 투입되어 특공대를 싣고 적의 심장부를 탱크처럼 돌진해 가기도했다. 함흥이나 원산에서 몇 량씩의 생이별들을 싣고 전선을 넘을 때면 기적소리는 절규에 가깝다. 그것은 곡진한 삶의 질곡들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토해낸 폐기음향肺氣音響 같은 것이었다.

뿌우∼, 기적소리가 뱃고동처럼 우렁차다. 증기시대가 가고 디젤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의 기적소리는 시작을 알리는 진군나팔이었다. 사람들은 상처와 폐허로 얼룩진 삶을 추스르며 가난한 땅에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기차는 파병열차 입영열차 산업열차로 이름을 바꾸어달고 개발의 시대를 달렸다. 뿌뿌, 연신 쇠울음을 토해내며 젊은이들을 공장으로 전선으로 머나먼 메콩강으로 실어 날랐다. 석탄과 시멘트를 싣고 밤을 새워 태백준령을 넘던 기관사들의 눈도 충혈로 들떴다. 외양간의 소들도 동구洞口를 돌아오는 기적소리에 금빛울음으로 화답했다. 비로소 기적소리가 밥이 되고 근육이 되고 생동하는 삶이되기 시작했다.

육중한 기관차가 무쇠심장을 한껏 열어 제치고 쌍나팔을 뿜어댄다. 소리의 음폭이 웅장하고 경쾌하다. 삼천마력터보엔진을 장착한 특대형기관차가 출현한 것이다. 기관차는 어느새 산뜻한 블루 톤으로 옷을 갈아입고 70,80시대를 견인하기 시작했다.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문명의 전리품들을 수송했다. 기차는 패랭이꽃 같은 누이들을 싣고 탈향의 기적을 울리며 보릿고개를 돌아 먼 곳으로 가곤 했다. 공단뒷골목에 값싼 청춘을 부리고 한 땀 한 땀 귀향의 꿈을 박음질 했다. 어머니는 사립문을 서성이며 둥근 추석 달을 앞세우고 돌아올 자식들을 기다렸다. 이때의 기적소리는 어머니에게는 기다림이었고 자식들에게는 어머니에게로 가는 한줄기 그리운 송신음이었다.

80년대의 기적소리에는 나의 애환도 한 자락 묻어있다. 나 역시 배움의 부푼 꿈을 안고 상경열차를 탔다. 성공하라며 손 흔드는 어머니를 철길 끝에 세워두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서울은 삭막했고 성공은 신기루와 같은 것이었다. 나의 방황이 길어질수록 어머니의 시름도 깊어졌다. 80년대 중반을 훌쩍 넘긴 어느 겨울날이었다. 내가 철마인생을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시한부 생을 받아둔 어머니를 위해 결혼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혼수품들을 일일이 챙기시며 그 화혼의 봄날을 손꼽아 기다리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장남의 성혼을 보지 못한 채 아들을 싣고 올 마지막 밤기차를 기다리다가 돌아가셨다. “서울 큰 아는 요번 기차로는 오냐?” 하시며 누이의 손을 꼭 잡은 채 도릿대를 돌아오는 기적소리의 순서를 헤아리다가 간발의 차로 떠나신 것이다. 어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밤기차 안에서 기적도 나처럼 늦게 울었다. 며칠을 내 속에서 이명耳鳴처럼 울었다.

몇 갈피의 세월이 무더기로 넘어갔다. 기차는 칙칙한 흑백시대를 벗어나 발랄한 스마트시대를 달린다. 사람들은 일상을 곧추세우고 직진관성에 가속을 붙인다. 기적소리도 속도에 강등되어 변두리로 밀려났다. 쇠락한 울음을 쿨럭이며 태백이나 정선골짝을 맴돌고 있다. 달캉거리던 삼등열차도 차창가로 흘러가던 보퉁이 같은 군상들도 이제는 긴 망각의 곡선 뒤로 사라졌다. 피난, 상경열차처럼 한 시대의 애환을 상징하던 집단이미지도 눈꽃, 스키, 금빛열차처럼 발랄한 여흥이미지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삼백 키로 속도에 앉아 즉물적 풍경을 즐긴다. 속도가 물질로 환산되는 시대이니 굳이 굽은 길 에둘러갈 필요가 있을까도 싶다. 기적소리 역시 현대인들에겐 추루한 감상으로 손절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마음한편으로 밀려오는 공허감은 무엇 때문일까.

기적소리는 위험을 알리는 기능적 측면 외에 정서적 감응을 함께 동반한다. 이는 기적소리가 우리에게 주는 독특한 공감각적 환기기능 때문이리라. 이 환기의 기표들은 과거로부터오고 부재한 기억들을 호명한다. 까만 밤을 달리던 기차, 멈칫멈칫 손 흔들던 기억, 어느 모퉁이 돌다가 문득 놓쳐버린 얼굴들, 그 소중한 시간들을 떠나 하루하루 녹슬고 마모된 채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오래 전 내 안에서 울던, 시대마다 다른 사연 다른 음색을 달고 전선으로 객지로 분산되던 그 많던 기적소리는 어디로 갔을까. 외진 간이역에 앉아 기적의 공명음에 마음의 유로를 열다보면 더러는 잊었던 시대가 보이고 잊고 산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뿌웅~, 하행열차가 태백역 쪽으로 달음질친다. 고추를 말리던 노인이 굽은 허리를 편다. 살살이 꽃들이 쉬어가라는 듯 연분홍 손을 흔든다. 여기선 아직 기적소리가 유효한가 보다.

나는 백년의 시간여행에서 돌아와 기적소리의 정서적 지향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한 시절, 지아비와 자식들을 싣고 폭폭, 눈 내리는 마을 에둘러 가뭇없이 멀어지던 기적소리, 격동의 환절기를 돌아 온 사람이라면 누군들 기적소리에 실려 온 추억 한 장 없을까. 쓰윽, 기적의 여음을 닦으니 오래 된 어머니가 달려 나온다. 그랬을 것이다. 저 기적소리는 세상의 모든 길을 돌아 종내는 그곳으로 돌아갔으리라. 기다림 쪽으로 가고 어머니를 향했으리라. 기적소리가 번성하던 시절, 기차는 역장의 발차전호로 떠나고 기적은 매번 어머니의 손끝에서 울었기에, 어쩌면 파랑 같은 한 시대를 떠밀고 온 힘은 어머니의 손끝에서 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여리면서도 강한, 그 손끝이 있었기에 지금의 그대가 있는 것이라고, 그 힘으로 오늘하루를 견인하는 것이라고, 기적소리는 그 멀고 아련한 잠언들을 일깨우며 내 생의 간이역을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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