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잔

                김완하

정선생 모친 장례식장에서
박선생 소개로 만난 사람
엊그제 연로한 부친 묫자리 보러 가서
좋은 터 있기에 자기 것도 예약해 두었다며

그때 바로 옆자리 예약하는
자기 또래의 사내와도 인사 나누었다며
나중에 묘지 이웃으로 만날 사람이기에
굳게 악수도 나누었다며

처음 본 그가, 죽은 뒤에나
이웃으로 만날 그 사내였기에
점심에 서로 술 한 잔 따라주었다며
빈 잔에 소주 가득 따라놓았네

주변에 함께 앉은 사람들
껄껄껄 허공에 빈 잔 하나씩 채워두었네
어느 사이 상가는 온통 이웃을 위한
이웃의 빈 잔으로 가득 찼네

[프로필]
김완하 : 경기 안성, 문학박사, 문학사상 등단, 시집[중부의 시학]외 다수

[시 감상]
잔은 채워야 맛이라는 시쳇말이 있다.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자. 어쩌면 비어 있을 때 잔은, 잔의 목적을 기다리는 순수함이 있지 않을까? 채워야 한다는 것이 목적이라면 비워야 하는 것도 목적일 수 있겠다. 이웃이라는 말, 친구라는 말, 주변이라는 말, 우리는 모두 빈 잔이었다가 이웃, 친구, 주변이라는 채워진 잔이 된다. 지금 나는 누구의 빈 잔으로 따듯한 정이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빈 잔이 되어보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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