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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부리 영감의 김포이야기] 시주받은 스님 <79>

조선은 유교 국가입니다. 고려 때는 불교가 국교였기에 사대부들에 의해 철저히 탄압받았습니다.
마을에 있던 절을 모두 폐사되고 산중 깊숙한 곳의 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존경받았던 스님들은 천민취급을 받아 성을 쌓는데 동원되거나 종이를 만들어 조정에 받쳐야 했습니다.
수도하는 절은 산에 놀러 온 양반들의 유흥장소가 되고 스님들은 이들의 임시하인이 되어 수발해야 했습니다.

이들의 횡포로 문을 닫고 절을 떠나는 스님들이 속출했는데 ‘빈대가 끓어서 중이 절을 떠났다.’는 말이 여기서 생긴 것입니다. 빈대는 바로 사대부들을 비유하는 말이지요.
명종 때 어머니 문정왕후에 의해 불교가 크게 일어나긴 했지만 죽은 뒤에 다시 탄압을 받아 지금 서산대사를 중심으로 반역의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을 당취라고 하는데 내년 왜란이 일어났을 때 모반을 계획하던 스님들은 창끝을 일본군에게 돌려 승병이 되지요.

그건 나중의 일이고 산속에서 자급자족이 어려운 스님들은 탁발하러 동네에 들어옵니다.
수행의 하나로 밥을 얻어먹는 것이 탁발인데 백성의 마음에는 불심이 남아있기에 쌀이나 잡곡을 시주하곤 하지요.
스님도 가난한 집보다는 부잣집에 가서 탁발하는 것이 마음이 편해 발길이 오늘도 소슬 대문 높은 어느 부잣집 앞에 서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합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노스님을 보고는 황급히 외칩니다.
“노스님, 어서 자리를 피하세요. 봉변당합니다. 어서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시주가 아니라 봉변이라니요. 노스님은 귀라도 먹었는지 계속 목탁치며 염불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대문이 열리면서 심술궂게 생긴 영감이 삐죽 고개를 내밉니다. 눈이 마주친 행인은 얼른 자리를 피하고 영감은 빤히 노스님을 바라봅니다.
“나무아미타불, 시주님. 부처님께 복을 지으십시오.”
하자 영감은 대문을 확 닫으려다 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에 영감은 깨진 바가지에 뭔가 가득 담아 가져와 노스님의 바랑에 넣었습니다. 구린내가 진동하는 똥이었습니다.
“내가 드릴 것은 이것밖에 없으니 많이 잡수시오.”
하고는 대문을 콱 닫는 것이었습니다.

노스님은 화도 내지 않고 합장하고 절하고는 뒤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걸어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스님! 스님! 하고 부릅니다. 멈춰 서서 돌아보니 한 아낙이 헐레벌떡 뛰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한 자루의 콩이 들려 있었습니다. 
“스님, 저의 시아버님의 죄를 용서하시고 이 콩 자루를 받아주십시오.”
하며 자루를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노스님은 똥이 든 바랑을 내려놓고 콩 자루를 짊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아낙에게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며칠 후에 비가 몹시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아기를 업고 집을 나와 저 언덕 위로 올라가십시오.”
이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에 정말 비가 쏟아졌습니다.
콩을 노스님에게 시주했다는 것을 안 시아버지에 의해 며느리는 크게 혼이 났습니다.
의기소침해서 있는데 노스님의 말대로 폭우가 쏟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귀신에 홀린 듯이 얼른 아기를 업고 대문을 나서 언덕으로 향했습니다. 언덕에 올라와 보니 집은 사라지고 연못이 하나 보일 뿐이었습니다.
이런 전설은 전국에 펼쳐있는 전설입니다. 그만큼 불교에 대한 탄압이 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네요. 그 여자는 남편이 있던가요 없던가요. 부잣집에 하인이나 하녀가 있던가요 없던가요. 그건 모두 생략입니다.
재담이나 전설을 두고 따지고 들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려니 하고 들으면 되는 겁니다.

최영찬 소설가

김포신문  gimpo12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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