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金井山) 봉릉사(奉陵寺) 효종(曉鐘)

梵唄暫休板閣登(범패잠휴판각등)
擊鐘撞撞一閑僧(격종당당일한승)
擅名豈獨寒山寺(천명기독한산사)
和月殘聲是奉陵(화월잔성시봉릉)
 

1910년도에 발간한 금릉군지(金陵郡誌)에 있는 봉릉사(奉陵寺) 효종(曉鐘)이라는 시다. 금릉은 현재 김포시다. 동국여지승람을 검색하면 김포현과 통진현을 합쳐야 김포시를 알 수 있다. 확장하면 양천현까지 검색해야 설화를 이해 할 수 있다. 김포는 한민족의 축소판이다. 남한에서 고구려 땅 전체를 볼 수 없듯이 김포평야를 현재의 김포만을 가지고는 이해할 수 없다. 김포는 남북이 분단된 것처럼 김포공항, 장릉의 안산인 계양산과 검단까지 이웃 도시로 편입되고 접경지역으로 북방에 위치하고 있다. 서해안으로 직결하는 해상교통의 중심지로 삼한시대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지금은 강의 기능을 상실하고 40만 국민이 살고 있는 도시 전체가 철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김포문화 중에서 불교문화를 살펴보면서 고려의 수도 개경과 조선의 수도 한양의 중간 지점에 있었던 김포는 조선을 디자인했던 정도전부터 조선의 4대 문장가로 가현산에 살았던 신흠을 비롯하여 서거정, 양성지, 세조의 사위 하동정씨 세손, 고려의 문학대가 이규보, 토정비결의 이지함, 중봉조헌 등등 대가들이 살았거나 교류했던 곳이다. 장릉에는 21대 영조와 22대 정조가 행차하여 제사를 모셨던 곳이다. 스님으로는 태고보우, 나옹선사와 함께 고려말 3대선사로 추앙받은 백운경한 스님이 김포에서 수행했던 유서 깊은 곳이라는 사실이다. 종교를 넘어서 훌륭한 분들이 살았던 곳이다. 과거의 문화를 보면 현재 무엇을 해야 하고 미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명료해 진다. 그리고 도시철학의 바탕이 되는 탄탄한 스토리는 이미 깔려 있었다.

철책도 없고 분단도 없었던 고려시대에 강이 흐르는 마을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어서면 스님들이 수행에 정진했던 고산사가 있었다. 고산사는 나중에 터를 옮겨서 봉릉사로 이름이 바뀐다. 옛날 자취를 그려보면서 잠시 봉릉사 효종의 시(詩)를 풀어보자 “범패소리에 잠시 판각에 올라 쉬고 있으니 당∼당하고 종을 치는 스님이 한가롭다. 어찌 적적하고 한가로운 절로만 여기겠느냐 밝은 달과 산하를 울려주는 종소리가 있듯이 봉릉사는 적적하지 않다”는 내용이다. 1000년 전부터 있었다는 절터를 생각하면 시에서 표현한 한산사(寒山寺)의 뜻을 알 수 있다. 한산사를 다른 자료에는 중국에 있는 절로 각주를 달았지만 절 이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주변의 자연환경을 그려보면 시의 뜻을 접할 수 있다. 봉릉사는 현재 금정산에 있는 금정사다. 김포시에서 금정사를 소개하는 글을 보자.

「김포의 전통사찰 가운데 하나인 금정사는 신라 진흥왕(540~576)때 창건된 고상사(高上寺)로 알려져 있다. 조선 인조5년(1627년) 부근에 인조의 아버지 원종의 무덤인 장릉이 세워지면서 봉릉사(奉陵寺)로 개명되어 장릉의 원찰로서 기능하였다. 이후 폐허가 되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하였고 1974년 비구니 정념이 크게 중건불사를 일으키면서 ‘하늘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사(金井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봉릉사는 장릉 화소(산불을 막기 위해 능묘의 해자 밖에 있는 초목을 불살라 버린 곳) 안쪽 금정산 동편에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금정사에서  소개하는 자료를 보자

「신라 진흥왕(540~576년)때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고산사(高山寺)라고만 전하여 왔으며 달리 전해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인조 5년(1627년)에 왕은 자신의 아버지를 원종(元宗)으로 추존하고 어머니 역시 인헌왕후(仁獻王后)로 추존하여 묘를 양주에서 김포로 이장하고 장릉(章陵)이라고 하였다. 인근에 있던 고상사(高上寺)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장릉을 보호하는 사찰로 재건(再建)하면서 봉릉사(奉陵寺)라 칭하였다. 일제 강압기인 1930년에 당시 주지(住持) 영송화상(永松和尙)이 중수(重修)하였고, 1938년 주지(住持) 성화대사(成和大師)가 대한제국 말기에는 김포를 관장하던 현청을 일제가 철거할 때 출입문(三門)중 목재와 주춧돌 등을 일부 구입하여 사찰을 중수(重修)하였다」고 한다.

두 개의 자료에는 고산사(高山寺)와 고상사(高上寺)의 절 이름이 다르게 나온다. 본래 두 개의 사찰과 연관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고산사가 맞는 것으로 본다. 한자 표기도 다르다. 봉릉사 이전의 이름으로 나오는 고산사(孤山寺)를 고증하여 정리가 필요하다. 김포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은 통진현(통진읍, 월곶면, 하성면, 대곶면. 양촌면 일대)의 중심 사찰은 진산(鎭山)인 문수산에 있는 문수사(文殊寺)며, 김포현(고촌, 장기, 운양동, 풍무, 북변, 사우 감정동)의 중심 사찰은 진산(鎭山)인 북성산(장릉산) 주변에 있었다는 고산사(孤山寺)로 본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 기존에 있었던 사찰을 옮기고 이름까지 바꾸면서 장릉의 능침사찰(陵寢寺刹)로 존재했던 곳이 봉릉사다. 능침사찰은 금동대향로가 나온 백제에도 있었다.

정현채 
통진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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