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문화원 주최, 13일 대곶면 신안리 손돌묘서


1232년 고려 고종 때 참수당한 주사(舟師) 손돌공(孫乭公)의 제770주기 진혼제가 김포문화원 주최로 지난 13일(음력 10월20일)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내 손돌묘에서 봉행됐다.
이날 행사에는 박종우 의원, 김동식 시장, 신광식 시의회의장, 강경양 경찰서장, 시의원, 각 당 관계자 및 기관단체장과 김포유림, 문화원 이사 등 2백여명이 참석했으며 대곶중학교 사물놀이반·바라반 학생 50여명이 손돌공을 추모하는 공연을 열었다.
대곶면 신안리 산105번지에 소재한 손돌공의 묘는 1970년 신안2리 마을총회에서 묘소를 복원하기로 결의하여 부락민 연인원 120명이 동원돼 4일간 복원 공사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해 4월 기관, 사회단체, 학생 등 4백여명이 참석하여 첫 후염제를 봉행했다. 또한 1984년에 김포의 3대얼로 손돌공의 충성심을 선정, 교육자료로 삼았으며 1988년부터 매년 음력 10월20일을 기해 진혼제를 봉행하고 있다.
─ <손돌공 유래> ─
서기 1231년 몽고병이 대거 침입하여 고종은 위급을 면하려고 화평을 내세워 돌려보냈으나 몽고의 부당한 조공의 요구에 불복,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심하고 1232년(고종19년) 강화로 파천하게 된다. 고종은 충신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예성강 벽란도를 거쳐서 손돌이의 배를 타고 임진강과 한강하류를 거쳐 강화도로 가게 된다. 가는 도중 지금의 대곶면 신안리와 강화도 광성진 사이의 해협이 협소하고 급류가 흐르는 목에 닿게 되었다. 이곳은 앞이 막힌 듯이 보이는 지형으로 처음 가는 사람은 뱃길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곳으로 파천하는 고종은 심기가 어지럽고 마음이 초조한 나머지 뱃길도 없는 곳을 향하여 배를 젓는 손돌이를 의심하여 수차에 걸쳐 뱃길을 바로 잡도록 주의를 주었으나 그때마다 손돌이는 아뢰기를 “보기에는 앞이 막힌 듯 하오나 좀 더 나아가면 길이 트이오니 폐하께서는 휴념하여 주옵소서”라고 진언했다. 고종은 마음이 초조하여 이것은 자신을 해하려는 손돌이의 흉계로 의심하고 신하들에게 손돌이를 참수하라고 명하기에 이른다. 손돌이는 죽음에 직면하고도 임금의 안전항해를 바라는 충정에서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바가지를 따라가면 뱃길이 트일 것을 아뢰고 참수되고 말았다.
이후 왕의 일행은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목적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왕은 늦게서야 깨달아 손돌이를 잘 장사지내고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당까지 세워 주었다는 유래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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