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곶면의 지명유래
월곶면은 군하리, 고막리, 갈산리, 고양리, 포내리, 성동리, 보구곶리, 용강리, 조강리, 개곡리 등 총 10개 리(里)로 구성돼있는데 각 리마다 자연부락명이 있고 그 지명에 대한 유래가 있어 알아본다.
1. 군하리(郡下里)
조선시대는 통진읍이라 부르다가 행정구역폐합 후 군청소재지였다는 뜻에서 ‘군하리’라 불렀다.
▲곰바위(곰배)
이 동리 앞산의 바위 모습이 마치 곰과 같다 하여 ‘곰바위’ 또는 ‘곰배’라 부르고 있다.
▲봉골(봉골)
옛날 조선시대까지 전시에 봉화로 적의 침입을 알렸던 곳으로 통진현의 남산이 봉화지로 산밑 골짜기 마을을 ‘봉골’이라 부른다.

2. 고막리(古幕里)
1914년 행정구역폐합으로 고읍동(古邑洞)과 초막동(草幕洞)을 합해서 ‘고막리’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고읍동(古邑洞)
고읍동은 고려시대에 읍(邑)자리였는데 우참찬 민응형(閔應亨 1578∼1662), 의정부 좌찬성의 장지를 택정(擇定)한 후 군하리로 이전하였으나, 고려시대 통진읍 소재지라는 뜻에서 ‘고읍부락’ 또는 ‘고읍동’이라 부른다.
▲초막동(草幕洞, 초막골)
고읍동에 군졸이 거처하였는데 이곳에 초막(草幕)을 치고 있었다 하여 ‘초막동’이라 부른다.
▲납상골(納上谷)
옛날부터 백성들의 생산품을 현청(縣廳)에 바치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지어 부르게 되었다.

3. 갈산리(葛山里)
1680년경 갈씨(葛氏) 성을 가진 부자가 살았는데 그가 살던 곳을 자기성을 따서 갈(葛)뫼라 하여 ‘갈산리’라 칭하게 되었다.
▲점동(店洞, 동이점)
예전에 물동이를 만드는 질그릇점(옹기점)을 하여 ‘동이점’이라 칭하게 되었는데, 공부자(孔夫子)의 후손 공씨(孔氏)가 30여대를 이곳에 거주한다 하니 통진의 원거인(元居人)이라 할 수 있다.
▲비석동(碑石洞, 비선모루)
조선시대에 서울에서 강화와 통진읍을 왕래하는 대로변에 위치한 곳으로서 관찰사, 현감, 부사의 송덕비, 선정비, 불망비(不忘碑) 등 수십 개를 세웠던 곳으로서 ‘비선모루’ 또는 ‘비석동’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월곶면사무소 앞으로 옮기고 대로도 건너편으로 돌렸다 한다. 고어에서 ‘머루’, ‘모루’는 ‘산’이란 뜻을 가진 말이다.
▲오리정(五里亭)
통진부로 월임하는 부사나 현감은 이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객사가 문묘에 앙승하게 되었는데 상관환송 또는 영접을 하던 휴게소를 ‘오리정(五里亭)’이라 하였다. 즉 읍에서 5리에 있는 정자라는 뜻이 된다.
▲방마골
이 마을의 한 부자집에 백마가 있었는데 이 ‘백마(白馬)’가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백마곡(白馬谷)’이라 부르다가 음이 변하여 ‘방마골(곡)’로 부른다.
▲안진골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나무가 울창하고 조용한 골이어서 안전한 피난 고장이란 뜻으로 불려진다.

4. 고양리(高陽里)
이 마을은 타지역에 비해 지대가 높은 곳으로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진다 하여 ‘고양리(高陽里)’라 부른다.
▲능동(陵洞, 능골)
고대(古代)에 이곳에 능(陵)이 있었다 하여 ‘능동’이라 부른다.
▲안말(양달말)
이곳은 고양리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고 제일 나중에 진다 하여 ‘양달말’ 또는 ‘안말’이라 부른다.
▲고양포(高陽浦, 고양개, 원머루나루)
옛날부터 이곳 고양리에 강화와 인천을 왕래하던 포구가 있던 곳으로 ‘고양포’ 또는 ‘원머루나루’라고 불려왔다.
▲용(龍)의 머리
이곳에는 태봉산(胎峰山)이 있는데 그 형상이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겨서 용(龍)의 머리라 하여 아들을 낳으면 태(胎)를 이 산에 묻어서 ‘태봉산’이라 부르고 있다.

5. 포내리(浦內里)
조선 중엽에는 포구로 어업이 위주였으며, 3면이 개펄로 둘려 있어 ‘포내(浦內)’라 부르게 되었다.
▲포내(浦內)
포구 안쪽에 동리가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수현동(水峴洞, 무내미)
물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이 높은 고개를 넘는 것 같다 하여 ‘수현(水峴)’이라 부르게 되었다. ‘물넘이’가 ‘무내미’로 변한 것이다.

6. 성동리(城東里)
1914년 행정구역폐합 당시 성내리(城內里)의 ‘성(城)’자와 동막동(東幕洞)의 ‘동(東)’자를 합하여 ‘성동리’라 불렀다.
▲산성(山城, 성내-城內)
산으로 성(城)을 이룬 그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성내(城內)’ 또는 ‘산성(山城)마을’이라 부른다.
▲동막(東幕, 옥암동)
이 동리의 동쪽에 문수산(文殊山)이 병풍처럼 둘러막혀 있어 ‘동막(東幕)’이라 불러왔으며 일설에는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옥암동(옥암동)’이라고도 하였다.
▲문수골(文殊谷)
문수산 중턱에 있는 마을로 샘이 나고 절도 있으며, 밑으로 골이 지고 경치도 아름답다. 골짜기로 흐르는 많은 물을 가두어 저수지도 만들어져 있다.

7. 보구곶리(甫口串里)
본래 보구곶면(甫口串面)이던 것이 1914년 행정구역폐합 당시 월곶면에 병합 후 ‘보구곶(甫口串)’리라 불렀다. 그리고 이곳을 ‘보수구지’라고도 한다.

9. 용강리(龍康里)
▲용연동(龍淵洞, 용녕포, 龍寧浦, 용못)
월곶면 문수산(文殊山) 동편에 위치하며 1000년경 즉, 고려 초에 이곳은 물오리가 많이 모이는 못이 있는데 하루는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고 하더니 못(淵)이 넓어지고 그곳에서 커다란 용(龍)이 하늘로 올라갔다 한다. 그 후 이 못을 용연(龍淵)이라 부르게 되었다. 용연 뒷산에는 고려시대에 용호사(龍湖寺)가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또 용무(龍舞)골에는 괴기석(怪奇石)이 많다. 용연벌은 지금은 논으로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데 7년간 계속되는 가뭄에도 풍년이 들었다 한다.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면 통진부사(通津府使)는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지금은 논이 널리 확장되어 약 30여 정보가 옥토가 되어 대한(大旱)이나 큰 비에도 용연(龍淵)에는 물이 더 늘지도 줄지도 않고 넓은 들을 적셔준다고 한다.

9. 조강리(祖江里)
이곳 조수(潮水)의 물참이 타지방에 비하여 가장 정확하다 하여 강중(江中)에 으뜸[元朝] 즉, 밀물 썰물의 기점으로 정하고 표준화한 뜻에서 ‘조강’이라 하였다.
▲울안리
조선시대 서울 한양의 한 부자집 3형제가 조강리(祖江里)로 이사하여 살면서 기와집을 짓고 울타리를 쳤는데 그 울타리가 너무 컸기 때문에 울타리가 없어진 근래에도 그 마을을 ‘울안’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자연조건이 북과 동서는 산으로 막히고 남쪽이 터진 아늑하고 조용한 울안이라 부른 것도 같다.
▲조강포(祖江浦)
고려시대 송경(개성)을 가자면 이곳 나루를 건너 풍덕으로 가야했고, 조선시대에 이토정(李土亭) 선생이 조강(祖江) 뒷산에 올라가 조수간만(潮水干滿)의 시각을 측정(測定)하던 포구(浦口)라 하여 조강포(祖江浦)라 부르게 되었다.
▲내곡동(內谷洞)
이 마을의 지형이 사방으로 산이 막혀 있고 그 골 안에서 촌락을 이루며 살았다 하여 ‘내곡동’이라 부른다.
▲선돌(仙岩, 선바위)
마을 뒷산에 선바위라는 바위가 있어 ‘선암’ 또는 ‘서 있는 바위’라 하여 ‘선암’이라 부른다 한다.

10. 개곡리(開谷里)
행정구역폐합시 개화리(開花里)와 유곡리(柳谷里)를 병합하여 ‘개곡(開谷)’리로 하였다.
▲마원(馬院, 말안이)
동리 가운데에 소천(小川)이 있는데 이곳을 말(馬)로 왕래하였기 때문에 ‘마원’ 또는 ‘말안이’라 부른다.
▲조산(鳥山)
옛날 조강거리를 거쳐 조강나루를 통하여 개성을 오고 갈 때,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는 아름답고 조용하여 쉬어가는 고개길이라서 ‘조산(鳥山)재’라 불러왔다.
▲개야(開野, 개리)
마을 뒷산이 북풍을 막아서 봄에 꽃이 일찍 핀다 하여 ‘개화리(開花里)’라 하였으나 지금은 ‘개야(開野)동’이라 부른다.
▲가오루(佳梧樓)
예전에 이 마을에 오동나무로 지은 서당이 있었고 이 서당을 ‘가오루’라 부른 데서 마을이름을 ‘가오루’라 부르게 되었다.
▲사야(沙野, 사래울)
고려시대에 왕릉을 세우려다가 모래가 많아서 세우지 못하였다 하여 ‘사야(沙野)’ 또는 ‘사래울’이라 불려진다. 사방이 산으로 꽉 막혔고 부근 토질이 마사(굵은 모래)로 덮여 있다.
▲석원동(石院洞, 돌안, 돌산)
동학난 때 적군을 돌로써 방비하였다 하여 ‘석원동’이라 부른다.
▲가마골(釜谷, 부곡)
마을이 산에 싸여 솥안과 같다 하여 ‘가마골’(부곡, 釜谷)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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