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기전(愛妓傳)

조성춘 / 김포시청 교통과장

 

1. 프롤로그

전투복 위에 방탄조끼를 걸쳐 입고 철모를 깊게 눌러쓴 다부진 체격의 수색대대장은 국방대학 졸업 기념으로 받은 영웅 만년필을 꺼내 투박하게 자신의 이름 위에 서명을 했다. 다소 상기된 표정의 군수도 녹색 사인펜을 꺼내 날렵하게 사인을 했다.

서로 인계인수서를 교환한 군인과 군수는 의례적인 악수를 하고 이내 해안초소를 나왔다. 차가운 날씨 속에서도 많은 취재진이 두 사람을 둘러쌌다. 저만큼 한길에서는 수색대대 병사들이 황소를 IBS에서 차로 옮겨 싣고 있었다.

 

2. 하조강(下祖江)나루

“영감, 물이 깊습니다. 지금이라도 배를 띄워야 야음(夜陰)을 탈 수 있습니다.”

벌써 조강(祖江)의 물은 사리를 지나고 있었다. 조강은 한강과 임진강의 물받이라 중간 중간에 모래톱이 많았다. 사리 때를 놓치면 상조강에 제대로 닿을 수 있을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한 명이라도 더 태워라. 더 태운다고 해서 배가 가라앉지는 않을 터. 비록 오랑캐를 막지 못한 죄는 죽음으로 감당 할 수 있으나 오랑캐들로부터 백성을 구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편히 명부에 들지 못할 것이다.”

이미 청국 기마대에 쫒기면서 몸은 만신창이가 된지 오래였다. 대동강 변에서 적장의 비수 같은 창을 오른 손으로 받았다. 좌수 검을 익힌 탓에 적장의 목은 취했지만 조강을 건너는 유일한 포구인 이곳 하조강에 오기까지 오른손은 짐이었다.

빈농가에서 금창약을 바르고 속치마를 끊어 동여매기는 했지만 피가 굳은 건지 아니면 언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된 게 여러 날이다. “영인아 배를 띄워라. 이제 갈 시간이다.” “영감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이신지...” 평안감사 이중학(李仲學)은 문득 눈을 들어 영인을 보았다. 눈이 깊은 아이다. 대제학을 지낸 조부의 불호령을 들으며 금강산에서 5년을 지냈다. 이름도 없는 무승(武僧)으로부터 호된 무예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거둔 아이가 영인이었다. 그해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를 하고 중학은 부친께 청을 넣어 영인을 3년간 금강산에서 지내게 했다. 사사로이는 사형제간이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오랑캐를 맞는다. 너는 즉시 배를 몰아 조강을 건너라.” “그분께서 상심이 크실 것입니다...” 그녀를 입에 올리는 영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조정의 명을 따랐다고는 하나 나는 패장이다. 패장은 죽음으로 그 죄를 씻어야 하는 법. 사사로운 정을 논할 때가 아니다.”

“하오시면...저라도 영감 곁을 지킬 수 있게..” “안될 말.” 중학은 급하게 영인의 말허리를 끊었다. 안다. 영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무얼 염려하는 것인지.

“한양의 부모와 식솔은 다소 어려움은 겪겠지만 전란이 수습되면 다시 평온을 찾을게다. 너는 그네를 돌봐 주거라. 다치기 쉬운 여인이다. 또 전란이 흉흉하니..”

“사형..” “사형..사형이라...” 영인에게서는 처음 듣는 말이다.”

금강산에서 삼년을 지내고 목검 한 자루로 중학을 향해 인사를 해 올 때도, 서얼은 무과에 조차 응시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저잣거리를 폭음으로 휘저을 때도 결코 목울대 너머로 뱉어내지 않았던 말이다. “사제, 내가 평양을 버리고 의주산성을 향했던 것은 병법보다는 조정의 명을 따랐기 때문이고, 의주성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병사를 풀어 피난행렬과 섞이게 한 건 후일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네. 여기까지네. 내가 더 이상 물러선다면 명분도 승리도 기약하지 못할 사사로운 욕심일 뿐이네. 가시게.”

 

3. 유도(留島) 황소 구출하기

낭패였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 반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끌어내다니...끌어내서 뭘 어쩌자는 건지....’ 젊은 군수는 자신도 모르게 보고서를 움켜쥐었다. 유도에 황소가 한 마리 서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게 병자년이 저물던 12월 말께였다. 처음에는 비무장지대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북한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추정되는 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유도가 어디던가. 김포반도와 개풍군 사이를 흐르는 조강이 서해로 나가기 전 숨을 고르는 어귀에 있어 일반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땅이다. 지금은 백로와 저어새들이 둥지를 틀어 국내 동식물 학자들 사이에서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6.25 전후만 하더라도 남과 북이 서로 매복 작전을 벌이고 많은 인명이 스러져간 곳이기도 했다. 그 불모의 땅에 소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수는 전율 했었다. 기회였다. 서울과 인천이라는 매머드 도시 틈바구니에서 변변한 자원도 없이 쌀농사와 허접한 중소규모 공장들만 난립한 이곳 김포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더욱이 내년 시 승격을 앞두고 김포를 확실하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군수는 구겨버린 보고서를 다시 폈다. “유도 내 소 살리기 운동 전개계획“은 군수가 직접 실무 직원을 불러 하명한 것이었다. 유도 내 소를 북한에서 지난여름 장마 때 북한에서 떠내려 온 것으로 단정하고 먹이가 부족한 유도에 사료를 공급하면서 남한의 암소를 한 마리 넣어주어 남북이 함께 건사케 함으로써 유도를 평화통일의 상징지역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 계획서에 담겨 있었다. “내무과 민 과장 좀 오라고 해요” 군수는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비서를 통해 담당과장을 찾았다. “군수님 찾으셨습니까?” 과장은 군수실에 들어와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군수를 응시했다. “앉으세요.” 민 과장은 회의용 사각 테이블 오른쪽 의자를 내어 조심스럽게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 군수는 조금 전 국방부 작전처장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메모한 종이를 내밀면서 급하게 물었다. “죄송합니다. 일이 이상하게 꼬여 버렸습니다.” 과장은 마치 자신의 불찰로 일을 망친 것처럼 말했다. “알고 있었나요 ?” “네, 조금 전에 국방부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뭐랍니까 ?” “오늘 아침 국방부에서 브리핑 계획이 있었던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국방부에서도 우리 계획대로 유도에 소를 그냥 두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발표를 할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여론이 문제였나? 여하튼 소를 살리고 보자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작전이 급하게 변경된 데는 오늘 아침 언론 보도가 가장 큰 이유라고 합니다. 수의사와 여물을 갖고 유도에 들어가기 위한 해병대 작전이 시간 단위까지 활자화되어 보도되자 국방부에서는 북한 당국을 지나치게 자극할 것으로 우려를 하고...아마도 그 때문에 군 수뇌부에서는 문제를 더 이상 확대시키지 말고 이쯤에서 종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BH에까지 보고를 한 모양입니다.” “언론이 문제였군..” 군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동안 유도 황소를 통해 김포라는 작은 군이 전국적인 관심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건 신문과 방송의 덕분이었다. 그래서 유도 황소 문제에대해서만은 작은 일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쓰면서 그때그때 정보로 제공을 해왔다. 그런데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가는 바람에 일을 이 모양으로 만든 것이다. “어차피 일은 벌어졌습니다. 후보계획대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과장은 의자를 군수 앞으로 바짝 다가앉으면서 결재판을 펼쳤다.

 

4. 장마 속에 바뀌는 운명

사흘째 퍼붓고 있는 장마는 하늘에 구멍이라도 낸 듯 좀처럼 기세가 누그러지지 않았다. 이미 마을 앞 논바닥에는 바다처럼 물이 들어찼다. 협동농장 왼편 가에 판자를 대충 얽어 지은 외양간이라고 별반 상황이 좋을 리는 없었다. 평소에도 들이며 산을 뒤져도 뜯을 풀이 없었는데 장마를 핑계로 아주 굶길 작정인지 외양간을 담당하는 지도원은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외양간 바닥까지 비가 들이쳐 들어 눕기조차 싫다. 연신 계속되는 뇌우에 어린 송아지들은 비썩 마른 몸을 어미에게 비벼대며 왕방울만한 눈을 내리 깔고 눈치를 본다. 다시 찌릿한 벼락이 번쩍였다. 잠시 후 큰 뇌성이 울렸다. 우르릉..꽝..우르...뇌성이 지난 후 빗줄기는 한층 굵어졌다. 바람도 미친 듯이 휘몰았다. 갑자기 사위가 조용했다. 큰 귀를 쫑긋해 봐도 낡은 지붕에서 낙수 지는 소리 밖에는 없었다. 심한 불안이 엄습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이었다. 고삐를 풀어야 했다. 아니 빨리 저 고삐를 끊어야 한다고 강력한 뇌파가 사지로 빠르고 연속해서 전달되고 있었다. 네 다리를 외양간 바닥에 깊게 묻고 온 힘을 다해 도리질을 해댔다. 코로 입으로 허연 김이 쏟아져 나왔다. 목울대를 타고 고함이 터져 나왔다. 음~메~~ 외양간에 매어진 여덟 마리 모두가 용을 쓰고 있었다. 송아지 몇은 벌써 어미들에 밟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와지끈! 외양간 뒷벽이 종이처럼 찢어지면서 검붉은 물체가 들이 닥쳤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렇게 애를 써도 꿈쩍도 않던 고삐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보드라우면서도 강력한 물체 더미가 몸뚱이를 감싸 안고 쏜살 같이 내닫고 있었다. 몇 번을 굴렀는지 모른다. 입에도 코에도 온통 황토가 쏟아져 들어오고 뿔이 어디엔가 걸릴 때마다 목뼈가 욱신거렸다. 무언가에 오른쪽 앞발이 된통 채인걸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불에 덴 듯 한 익숙한 통증이 엄습했다.

처음 세상에 나와 걸음을 떼고 천방지축으로 내달릴 때는 고삐도 없었다. 몸집이 제법 불어 사지에 힘이 오르는 걸 느낄 무렵 사람들은 목에 줄을 감고 고삐를 채웠다. 협동 농장의 어린애들은 순하고 약했다. 고삐를 잡고 끌어도 충분히 밭두렁 콩대를 훑고 무청을 휘감을 수 있게 되자 지도원은 코뚜레를 뀄다. 아름드리 상수리나무 두 그루를 기둥 삼아 가로막대가 걸쳐 있었다. 헤진 옷가지와 거친 멍석 조각을 배에 두르고 꼼짝없이 가로막대에 매달렸다. 버둥거려도 네발이 땅에 닿질 않았다. 지도원은 시뻘겋게 달군 쇠꼬챙이를 들고 와서는 놀랠 틈도 없이 코를 뚫었다. 벼락이 치는 듯 한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매캐한 연기 속에서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고소했다. 지도원은 노간주나무로 만든 코뚜레를 꿰고는 비로소 발을 땅에 내려줬다. 코뚜레는 욕망을 저지하고 자유를 억제했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흙속에서 버둥거리고 물속에서 휘적거린 기억만 가물거린다. 정신을 차린 건 희미하게 익숙한 냄새를 맡고서였다. 생선 비린내다. 그것도 숭어 냄새였다.

 

5. 평안감사로 가시게

중학이 평안감사로 부임을 하게 된 건 대제학을 지낸 조부의 바램도 아니었고 이조참판을 하다가 한성판윤으로 있는 부친의 덕도 아니었다. 중학을 평안감사로 추천한 이는 병판 최명길이었다. 임란과 광해를 몰아낸 인조반정의 혼란이 도성과 조산 팔도를 흉흉하게 하는 동안 북쪽에서는 누루하치가 여진을 일통하고 국호를 청이라 칭하면서 조선으로 하여금 명과의 관계를 끊고 조공을 바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에 오른 인조는 사실상 국정을 장악할 힘조차 없었다.

중학이 임지로 떠나기 전 명길이 중학을 청했다. 비록 내금위장을 맡고는 있었지만 나이나 출사 연수에 비해 평안감사로 나가는 일은 대단한 승차였다. 중학은 명길을 찾는 길에 조부가 지신사로 명에 다녀오면서 사 온 벼루를 가져다 슬그머니 디밀고 머리를 조아렸다. “대감의 보살핌이 너무 크외다. 성은도 감당키 어렵거늘 어찌 갚아야 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아닐세. 인사는 무릇 적재적소라 했으니 영감께서 그만한 그릇이고 이제 좁은 우물을 벗어나 세상을 크게 볼 때가 되었음이야.” 명길은 화로를 뒤적여 불씨를 살린 후 중학에게 권했다. 명길은 새삼 중학을 살폈다. 너른 이마 우뚝한 콧날이 시원했다. 짙은 눈썹 아래로 눈은 깊었고 다부지게 다문 입은 굵은 붓으로 한 획에 그은 듯 보였다. “그래, 조부님께서는 별래무량 하신지..” “연세에 비해 아직 총기를 잃지 않으신 정도입니다.” “대제학께서 조정을 호령하실 때가 생각나는군. 나 역시 출사한지 얼마 되지 않는 아해의 나이였음에도 대제학의 호통에 조정 대신들이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속이 후련해지곤 했다네. 그에 비하면 판윤께서는 대가 좀 약하신 편이지. 오히려 헌헌한 자넬 보니 자네가 대제학의 진전을 이은 모양일세..헛헛.” 무어가 좋은지 명길은 중학을 앞에 앉혀 놓고 연신 호방한 웃음을 지었다.

“학문도 일천한 무골을 서북 변방으로 보내실 때는 다른 의중이 있사온지요 ?” 기어이 중학은 명길의 답을 먼저 청했다. “이보게 중학이. 자네는 내가 어찌 보이는가 ? 자네 눈에도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 나라인 청에 붙어서 명줄을 이어가고자 하는 모리배로 보이는가 ?” 명길의 눈이 갑자기 형형하게 타 올랐다. 중학은 소름이 끼쳤다. 문인들이란 그저 붕당을 지어 탁상공론이나 하는 무리쯤으로 알았는데 지금 명길이 보여주는 강단은 자신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병법에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자가 진정한 장수라 했습니다. 저는 장수로서 내 한 몸의 체면이나 명분이 결코 부하 장졸과 백성의 안위보다 중하지 않다고 여길 뿐입니다.” “그럼 묻겠네. 지금이 나아갈 때인가 아니면 물러날 때인가 ?” 명길의 물음은 엄하고 무거웠다. 집으로 향하는 중학의 걸음이 어지러웠다.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정의 의도는 분명했다. 도원수 김자점은 산성전을 천명하고 임경업을 의주산성으로 보냈다. 그리고 유사시 주변 수령 방백은 모두 의주에서 경업에게 힘을 모으라고 했다. 인조 대왕과 비변사의 요구는 단호했다. 평안감사로 보내니 감영의 군사를 몰아 의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청태조의 전략이나 용골대의 용병술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오랑캐를 철저하게 무시한 병법이었다. 지피지기를 벗어난 패를 들고 명나라보다 강력한 청을 상대하려 하고 있었다.

 

6. 인연..숭어

감영이 있는 평양성은 생각보다 튼실했다. 임란 중에 왜장 고니시는 이곳 평양에서 이여송이 지휘하는 조명 연합군을 막기 위해 성을 개조했다. 이제 왜장이 고쳐놓은 성에서 청을 맞아야 했다. 중학은 영인 하나만 데리고 성내를 돌았다. 크기로야 한양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더 왁자했다. 아마 서북인들의 기질 탓이리라. 그런 와중에도 남으로 길을 떠나는 백성이 많았다. 이미 성중에는 청나라에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조선을 넘을 것이라는 말이 돌고 돌았다. 조정의 파발은 이미 어제 다녀갔다. 즉시 군사를 몰아 의주로 향하라는 지엄한 명이었다. 어명은 급하고 가파르게 문장을 달렸지만 한양에서 평양을 몰아세울 힘은 없었다. “저 곳에서 요기나 하자꾸나.“ 중학은 영인을 앞세워 대동강변 주막으로 들어섰다.“국밥 됩니까 ?” 영인이 아낙에게 물었다.“국밥은 어렵고...마침 막 잡아 온 숭어가 한 마리 있는데 회를 떠 올리지요.”“아무 거라도 요깃거리 좀 마련해 주십시오.”아낙은 객방 앞 바구니를 뒤져 어린애 팔뚝만한 숭어를 집어 올렸다. 싱그런 비늘이 햇살을 받아 퍼덕거렸다.“그 놈 참 실한 게 용궁에서 나온 듯합니다.” 영인이 아낙의 뒤태를 살피며 객쩍은 소리를 했다. “영감 드시지요.” 사념에 빠진 중학을 개운 것은 영인의 재촉보다 비릿한 갯내음이었다. “숭어라 했나 ?”“네, 모잽이를 겨우 벗어난 놈이지요.” 아낙이 굵게 져며 낸 숭어 살을 채반에 받쳐 들고 서 있었다.“그래..동어가 자라 모잽이가 되고 모잽이가 자라야 숭어가 된다지 ?”“대동강 숭어는 사방에서 녹아 든 진달래 꽃물을 먹고서야 제 맛이 난다고 합니다. 이제 진달래가 다 졌으니 맛이 그만일 것입니다.”

중학은 숭어 살점을 집어 된장을 듬뿍 찍어 입안에 넣었다. 비릿한 개흙 냄새가 입 안 가득 들어왔다. 살점은 달고 미끈했다. 모주 두어 되와 숭어 한 마리가 순식간에 없어졌다.

 

7. 평화(平和)의 소

“유도에서 구출된 황소는 국립수의검역소에서 질병 여부에 대한 검사를 받고 지금 막 김포군 농촌지도소에 마련된 우사에 입식되었습니다. 김포군수는 평화의 소라고 명명된 황소에게 직접 붉은 색 휘장을 달아주고 앞으로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길러서 일반인에게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상, 평화의 소 구출 현장에서 김현수 기자였습니다.” 군수는 TV를 껐다. 비록 유도에 황소를 두고 여물을 계속 넣어준다는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어쨌든 앞으로도 황소를 통해 관심을 끌 수 있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할 수 있는 계기는 충분히 마련된 것이다. 군수는 해병 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단장님, 김포군수입니다.” “아, 유군수. 이 시간에 어쩐 일이오?”

“네, 사단장님께서 애써 주신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하하..솔직히 유군수 입장에서야 좀 서운하신 것 아닌가요 ?”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유군수, 무슨 일이든 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오. 그걸 운이라고도 하지. 하지만 유군수 운이 결코 나쁜 건 아니오. 시승격을 추진하고 있는 일은 어쨌든 탄력을 받게 됐으니 말이오. 않그렇소 ?” 사단장은 군수의 고교 선배였다. 나름대로 군수가 원하는 대로 결론되어지도록 무던히 애를 썼지만 국방부에서 해병대 입지가 그리 넓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군수는 사단장과 통화를 마치고 내무과장을 불렀다. “북제주군과 자매결연이 되어 있지요 ? 북제주군의 암소를 평화의 소하고 짝지어 주면 어떨까요 ?” “어렵지 않을 겁니다. 찾아보겠습니다.”

내무과장이 나간 문을 쳐다보며 유군수는 신문 스크랩을 펼쳤다.

유도 황소를 찍은 사진과 내년 시승격을 앞두고 김포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모든 지방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군수는 집무실을 나와 대기하고 있던 1호차에 몸을 실었다. “평화의 소를 보러 가지.” 군수의 말에 운전기사는 곧 시청 현관을 벗어났다. 유도에서 구출된 황소는 월곶면에 있는 한우 농가에 우선 입식해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평화의 소는 편안하게 누워 여물을 되새김하고 있었다. 충분한 휴식과 보살핌 덕분인지 유도에서 나올 때 보다 몸집이 눈에 뜨게 불어 보였다. ‘너는 김포 소다. 나는 김포군수다. 네가 어디에서 왔던 나는 너를 지배한다. 나는 지금의 김포로 만족할 수 없다. 김포는 나로 인해 달라진다.’

군수는 소가 다친 다리를 절룩이며 애써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관사로 향했다.

홍도평 너머로 한강을 건너 불야성을 이룬 일산 신도시가 심술궂게 다가왔다.

 

8. 회군(回軍)....

군졸들은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다. 평양성을 떠난 지 사흘. 의주성으로 향하라는 어명을 받고 성내 군졸을 추슬러 7천 정예를 편성했다. 평양성을 나서며 중학은 관아를 모두 비우라 했다. 관비를 비롯한 모든 잡역들도 방면을 했다. 혹여 오랑캐가 들이 닥치거든 맞서지 말라했다. 보급부대도 없이 닷새치 건량과 말먹이를 겨우 준비해 나서 길이었다. 매일 한 번씩 의주성에 파발을 띄웠다. 의주로부터 소식은 없었다. 기별이 없기는 한양에서도 매한가지였다. “영감. 군졸들이 많이 상했습니다. 쉬어 가심이..” “안 될 말. 의주 성에 드는 일이 먼저이다. 그때까지는 한각도 지체할 수가 없다.” “설령 의주성에 든 다해도...태종이 의주성으로 오겠습니까 ? 워낙 험지인데...일부러 죽을 자리를 찾아 올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안주와 평양을 지키는 게 더 나을 듯싶은데...어찌하여 조정에서는..” “군령은 엄한 것이다. 나는 군령을 받들 뿐 판단하지 않는다. 일단 의주성에 들면 임경업 장군께서 복안을 갖고 계실 터...기우가 기우로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중학은 말을 몰아 중군을 벗어나 후군을 살폈다. 창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숨이 턱에 닿도록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의관은 이미 남루했고 미투리는 헤어져 버선이 진흙과 구별되지 않았다. 중학은 군졸의 이동을 잠시 쉬게 하고 선봉장과 중군장 그리고 후군장을 불러 모았다.

“군졸의 상태가 좋지 않은 줄 안다. 부상이 심한 자나 병이 든 자는 여기에서 집에 보내도록 하고 창검을 모두 지닌 자는 자신 있는 병장기 하나만 휴대토록 하라. 한 시진 후에 다시 의주로 향하겠다.” 이동 대열에서 병든 자와 부상자가 가려졌다. 개중에는 꾀병을 하거나 일부로 상처를 낸 자도 있었지만 중학은 짐짓 모른 채 돌려보냈다. 5백이 넘은 병졸이 진중을 떠났다. 막 행렬을 움직이려는 차에 후군에서 파발이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다. 개성유수가 보낸 급파발이었다.

“개성 유수께서 무슨 일로 파발을 띄우셨는가? ” 중학의 물음에 파발을 전하러 온 사내가 온 몸을 떨며 말을 이었다. “영감. 오랑캐가 이미 조강나루를 건넜습니다. 청태종이 직접 10만 군사를 몰아 의주를 지키시는 임경업 장군과의 싸움을 피하고 물길로 조선에 들어왔다 합니다. 태종과 용골대, 마부대는 이미 한양을 지나 전하께서 피난하신 남한산성을 에워싸고 있으며 기룡대가 이끄는 2만 군사가 평양성에 들었습니다. 유수께서 눈물을 뿌리며 개성을 벗어나시면서 의주성으로 들도록 계획된 감영과 군에 파발을 모두 띄우셨는데 다른 파발들이 제대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나이다.“ 사내의 말을 들으면서 중학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그랬단 말이지...결국 오랑캐들에게 조선을 다 내어주게 되었단 말이지..“ 이미 한양이 그네들의 손에 떨어졌다면 이곳에서 할 일은 없다는 얘기다. 그토록 믿고 의지했던 의주성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니 철저하게 무시된 것이다. 어찌 청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길이 하나뿐이랴. 그 많은 길을 다 틀어 막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험준한 산성에 서북 전력의 거의 전부를 몰아넣고 적을 마냥 기다리면 될 것이라는 조정의 판단은 애시당초 잘못된 것이었다. 중학은 영인을 불렀다. “모든 장졸을 한데 모으거라.” 6천여 장졸이 농사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논배미에 벼를 꼿아 놓은 것처럼 빼곡히 들어찼다. “나는 지금 감사로서 군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부럽지 않은 입성으로 살아왔다. 또한 글줄이나 읽고 남달리 배운 무예 덕분으로 무장이 되어 국록을 먹어 왔다. 그동안 이 한 몸 오직 전하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조선의 사대부로서 임금이 아닌 백성을 위해 죽고자 한다. 청국 오랑캐는 이미 물을 타고 조선에 들어왔다. 황공하옵게도 임금께서는 남한산성 누추한 오지로 난을 피해 계시며 왕자들께서는 강화도로 들어가 계시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이다. 조선이 망하는 것은 조정이 무너지는데 있지 않다. 백성이 없으면 조선도 없다. 백성의 마음이 살아 있다면 조선은 언젠가 다시 일어설 것이다. 나는 여러 장졸들이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오랑캐와 맞서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직 바람이 있다면 모두 살아남으라. 고향으로 가서 처자식과 식구들을 살려다. 농사를 하던 자는 호미를 들고 고기를 잡던 자는 그물을 손질하고 장사를 하던 자들은 다시 괴나리봇짐을 싸라. 이것이 조선을 살리는 일이다. 이것이 후일을 기약하는 길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살아남으라. 이것이 조선 사대부로서 마지막 부탁이다.“ “영감. 영감께서는 어찌하실 요량이 시온지..” 선봉장을 맡고 있던 조철휘가 물어왔다. 철휘는 본래 양주 사람이다. 풍양을 본관으로 하는 양반가문 자제로 학문의 깊이가 깊어 매사에 신중하고 판단과 일 처리가 날렵했다. 무관이 아닌 자에게 선봉을 맡긴 것은 용맹이 아닌 지혜가 필요한 탓이었다. “어명을 어기고 의주에 들지 못한 몸. 호란을 피해 남하하는 백성들을 돌볼 생각이네. 한명이라도 구할 수 있다면 그리 해야겠지.” “모시겠나이다. 수하 장졸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중랑장 이상 우리들은 모두 영감과 같은 조선의 사대부들이올시다. 청컨대 물리치지 마십시오.”

“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난이 끝나고 나면 조정이 뒤집히고 새로운 인재가 필요할 터 모두 나와 길을 함께 할 수는 없음일세.”

 

9. 피난 길..재회

중학은 곽산에서 길을 돌려 평양을 향했다. 의주로 향할 때와는 달리 말은 버리고 걸어서 가야 할 길이었다. 무장으로서 갑옷을 벗을 수 없기에 갑옷 위에 도포를 걸쳤다. 평양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백성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남으로 가야 산다는 사람들은 남으로 향하고 북으로 가야 목숨을 부지한다고 믿는 사람들은 북으로 향했다. 민가와 농지는 버려지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과 기르던 개들만 벌판을 쏘다녔다. 중학과 일행이 열 서넛 무리를 지어 걸음을 하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느새 난이 여기까지 미친 모양입니다. 백성들이 많이 어렵겠습니다. 영감.” 중학의 뒤를 바짝 따르던 영인이 대동강 줄기를 따라 평양성을 향하며 말을 했다. “그래도 오랑캐들이 성내에만 머물러 다행인 듯싶구나. 어차피 평양은 공성을 하였으니 그리 큰 피해는 없을 터. 적정이나 살핀 후 한양으로 길을 잡거라.” 중학 일행이 막 대동강 나루터를 목전에 둘 무렵 갑자기 인근 민가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 중학이 영인을 비롯한 수하들과 몸을 숨기고 기척을 염탐했다. 마당에는 살림살이가 아무렇게나 내팽겨져 있고 방안에서는 여인네와 사내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러서시오. 내 비록 조상들의 죄로 노비로 좌천되어 관기로 내쳐졌으나 한 번도 몸을 더럽히지 않았소. 또한, 전임 감사영감께서 면천을 해 주시어 어엿한 조선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거늘 감히 오랑캐 따위에게 몸을 맡기라 하신단 말이오?.” “이것 보라고.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아리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나 ? 자네 한 몸 보시한 셈 치면 성내 백성들이 다 편해지는 걸 왜 모르시나.” “딱하기도 하시오. 그대는 정녕 오랑캐의 말을 믿는단 말이시오 ? 설령 내가 오랑캐 장수의 품에 안긴다 해서 그들이 백성을 위해 무얼 해줄 수 있단 말입니까 ? 조선 백성은 오직 조선의 하늘 아래서 숨 쉴 수 있는 법. 오랑캐가 평양성을 접수한 그날부터 백성들은 모두 암흑천지에 들어선걸 모르셔서 그리 말씀하시는 게요 ?” “그렇게 절개가 굳으면서 왜 떠나지 못했는가 ? 왜 기룡대의 눈에 띄어 화를 자초하는가 말일세. 감사 영감은 이미 의주성에 들었을 터. 자네 사정을 알기라도 할 듯 싶은가 ? 그렇게 지켜야 할 절개라면 명줄이라도 끊지 그랬는가 ?”

“감사 영감은 오실게요. 비록 어명을 받아 의주로 떠나셨으나 어명이 잘못되었음을 진즉부터 아셨을 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니 반드시 오실게요. 난 그리 믿고 있소. 더 이상 나를 핍박하지 말고 그만 가보시구려.” 아 ! 그녀였단 말인가..

중학이 평양에 부임하여 미복으로 성내를 돌아보다가 만난 여자였다.

원래는 양반가 규수였으나 인조반정 때 역적의 집안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고 모친과 그녀만이 목숨을 부지한 채 관기로 내쳐져서 모친은 나주관아로 그녀는 평양 관아로 오게 된 것을 전임 감사가 면천해 주었다고 했다. 중학이 작은 초가 한 채를 내렸으나 그녀는 극구 마다했었다. 다만, 조석으로 드나들며 내당을 정리하고 중학을 챙겨줬다. 북방에 대한 근심과 조정에 대한 답답함이 그녀로 인해 풀어졌다.

서책은 늘 가지런했으며 이부자리도 반듯했다. 밥상은 항상 5첩 이내였지만 하나 같이 맛깔스럽고 정결했다. 무엇보다 무인의 투박함을 어루만지는 자상함과 따스함이 있었다. 중학은 그녀를 관기로 대하지 않았다. 첩실로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사나이 가슴에 자리 잡은 안식처이었다. 중학이 나서기 전에 영인이 먼저 나섰다.

영인은 날랜 몸놀림으로 방문을 열어젖히고 다짜고짜 사내를 메쳐 넘겼다.

“아이쿠” 소리와 함께 사내 둘이 문 밖으로 굴렀다. “웬 놈들이냐 ?” 창졸지간에 일을 당한 사내들은 문득 정신을 차려 영인을 쏘아 보았다. 영인이 중학을 쳐다보며 처분을 기다렸다. 그제야 사내들도 중학 일행을 알아 본 모양이다. “아니 ? 영감께옵서...죽여주십시오.” 사내들은 마당에 엎어지며 머리를 조아렸다.

알만한 얼굴들이었다. 평양성 호부에 속한 아전들이었다. 아마도 성을 비우라는 중학의 말을 듣지 않고 기웃 거리다가 기룡대에게 잡혀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찌된 일이냐 ? 너희들이 백성을 겁박하고도 감히 국록을 먹은 아전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 ? 단칼에 베어주랴 ?” 중학은 굵고 낮게 으르렁 거렸다.

“그런 게 아니옵고...이틀 전 기룡대가 2만 군사를 앞세우고 평양성에 들어왔습니다. 영감께서 하명하신대로 성내 백성들은 모두 떠났사온데...저이가 영감의 내방을 정리하다가 그만 기룡대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미색에 반한 기룡대가 극구 저이를 잡아 오라는 탓에...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성내의 상황은 어떠하냐 ?” “기룡대가 감영을 차고 앉아 태종이 거느린 10만 군사에 대한 보급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벌써 평양에서 개성에 이르는 모든 고을에 쌀과 건초에 대한 공출 령이 떨어졌습니다.”

“백성들은 어떻더냐 ?” “영감께서 의주로 떠나시기 전에 분부하신 대로 모두 성내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가서 주경야은 하고 있습니다만...전란이 오래되면 피폐해 지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내 명을 제대로 전달하였으니 목숨을 보전해 주마. 이 길로 떠나라. 식솔을 데리고 백성들 속에서 살아라.” 중학은 비로소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상기된 얼굴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듯 홍조가 남아 있었다. “욕 봤구나. 다친 데는 없는 게냐 ?” “영감의 은혜가 크옵니다. 천한 것이 영감께 또 신세를 졌습니다.” “되었다. 한양까지는 먼 길이다. 따르겠느냐 ?”

“지난번에 마음의 구명을 받잡고 이제 목숨을 구명 받는 년입니다. 열두 지옥이라도 따르옵지요.“

10. 유도(留島)..안식처

뭍이다. 짙은 갯냄새를 비집고 풀 향기가 코로 들어왔다. 개펄은 다친 다리를 더 무겁게 잡아 당겼다. 목을 길게 뺄 일이었다. 가슴께로 진흙이 미끄러져 빠져 나갔다. 얼마를 가만히 있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한 걸 보니 비는 그친 모양이다. 후텁지근한 밤바람이 혀끝을 스쳤다. 허기가 졌다. 되새김을 하려고 위를 뒤집어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 뒤가 저절로 벌어지며 물똥이 나왔다. 작은 낙원 이었다. 지천으로 깔린 풀은 기름지고 무성했다. 다친 발에 고름이 잡혀 욱신거리는 걸 빼곤 몸도 많이 추슬러졌다. 찢어진 등허리며 허벅지도 피딱지가 떨어진지 오래다. 골짜기 마다 샘이 있어 목을 축이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아침나절 샘 근처에서 풀을 뜯고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넘었다.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천천히 꼬리를 휘둘러 없는 파리를 쫒았다. 바람 속에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협동농장에서 맡아 본 냄새였다. 교미를 앞둔 소의 암내였다. 심호흡으로 냄새를 좆다가 흐엉~하고 크게 울었다. 아마 소리를 들었다면 찾아 올 것이다. 새벽녘에 문득 눈을 떴다. 무언가 어색한 기척이 있었다. 기척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가서야 할 일이었다. 기름진 배를 핥았다. 혀를 통해 가지런한 털과 함께 가벼운 떨림이 전해졌다. 이번엔 목덜미를 핥았다. 피하지 않고 목덜미를 마주 핥아왔다. 서서히 뒤로 돌아 뒤 허벅지와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움찔움찔 꼬리가 올라갔다. 앞 다리로 엉덩이를 짚으려 했다. 다친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왔다. 얼른 다리를 내렸다. 엉덩이를 흔들어 흙을 털어내고는 풀을 몇 번 뜯다가 힐끔 거리며 돌아다 봤다. 애가 탔다. 숨은 벌써부터 가빠있었다. 뭔가 할 일이 있는 듯싶었다. 아니 뭔가 해야했다. 다시 발을 올렸다. 꼬리가 하늘 높이 치켜 올려졌다. 강렬한 욕구가 아래로부터 머리끝을 뚫고 나가는 것 같았다. 두 눈은 부릅떠지고 적 벌어진 입에서는 알 수 없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첫 경험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저물도록 섬 전체를 쏘다니며 풀을 뜯었다. 코뚜레도 고삐도 없었다. 논두렁도 밭이랑도 없었다. 암소는 먹성이 줄었는데도 배는 제법 불러 있었다. 암소는 자주 까탈을 부렸다. 먹는 것도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으려 했다. 물가 근처에 암소가 좋아하는 배래풀이 지천이었다. 언덕배기 소나무 아래 누워 배래 풀을 뜯는 걸 보고 있었다. 서너 번 풀을 뜯고는 습관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두어 번 머리를 흔들고는 먼 산을 바라보았다. 다시 머리를 숙여 풀을 뜯으며 발을 내딛는 순간 눈앞에 화광이 뻗쳤다. 모를 일이었다. 풀밭에서 불이 나와 암소를 하늘로 띄웠다. 하늘이 석양보다 붉게 칠해졌다. 암소는 그렇게 죽었다. 물가 풀밭에서 지뢰를 밟고 죽었다.. 창자가 삐져나오고 아직 숨이 끊이지 않은 작은 송아지도 보였다. 다가가서 핥아보았다. 더운 피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매일 한 번씩 죽은 암소를 보러 갔다. 피는 굳었지만 이내 쉬파리가 꼬이고 구더기들이 끓었다. 송아지도 죽었다. 더 이상 핥아 줄 피도 없었다. 작은 섬에서 겨울을 낸다는 건 힘든 일이다. 풀은 이미 누렇게 변색하고 숨을 멈춘 지 오래다. 그나마 싸리며 칡넝쿨은 거칠긴 해도 먹을 만하다. 몇 번 눈이 내렸다. 곰솔 아래 몸을 뉘지만 찬 밤공기가 또다시 다친 다리를 괴롭힌다. 아마도 속으로는 곪고 겉으로는 얼어가나 보다. 걷기조차 힘든데 낮선 기척이 다가온다. 허벅지에 무언가 날아와 박히는가 싶더니 졸음이 쏟아진다. 굵은 동아줄에 또다시 몸이 묶였다. 300년 전처럼 다시 끌려가나 보다.

 

 

12. 별리(別離)..

평양을 떠나 개성을 거쳐 한양으로 가기 위한 배를 타야 하는 이곳 하조강에 이르기까지 중학은 수하의 대부분을 잃었다. 중학 스스로도 여기저기 검상과 화살 구멍을 받았다. 특히, 오랑캐의 기마군은 집요하고 날렵했다. 마상 궁술과 갈고리를 자유자재로 썼고 장창과 언월도는 중학 일행의 요혈을 파고들었다. 그나마 조선 산하의 지형지물이 중학의 목숨을 지켜 준 셈이었다. 영인도 무사치 못했다. 영인은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그녀를 먼저 지켰다. 영인이 배에 올랐다. 이제 배는 조금 물때를 타고 상조강으로 닿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만 가면 될 것이다. 당초 한양으로 길을 잡지 않고 김포로 잡은 일이 잘된 일이다. 임진나루가 이미 청의 수중에 있는 까닭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한양으로 가는 것 보다는 수원이나 강화로 갈 수 있는 조강나루가 모두를 위해 더 좋을 듯싶었던 것이다.

“나으리..그냥 남으실 생각이십니까 ?” 그녀였다. 그녀가 배를 내려 중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 갈 것이다. 이곳에서 백성들을 모두 실어 보낸 후 반드시 너를 찾을 것이다..” 중학은 지나가는 눈길로 그녀를 응시한 후 조강 너머 쑥갓머리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곳에서 여기를 볼 수 있을게다. 반드시 살아 남거라. 나도 꼭 살아서 돌아갈 것이다. 이건 사내로서의 약조이다.” “사내로서의 약조라 하셨습니까 ? 기다리지요. 영감이 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지요. 이 몸 그리 할 것입니다.” 배가 떴다. 으르렁 거리는 조강 물결을 따라 배가 기우뚱 기우뚱 멀어져 갔다. 중학은 칼을 뽑았다. 이제 자르는 일만 남았다는 걸 알았다. 만남을 자르고 인연을 자르고 적을 베고 자신을 베어야 할 일이었다. 멀리서 청국 깃발을 요란하게 흔들며 기마대가 한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13. 에필로그

영인은 애기의 시신을 손수 거두었다. 쑥갓머리 산에서 조강 너머 하조강나루를 향해 눈을 든 채 주검으로 발견된 게 이틀 전이었다. 애기는 하조강 나루에서 중학을 그렇게 보내고 상조강에 닿은 후 매일을 쑥갓머리 산에 올랐다. 열 두해를 그렇게 기다리다 지쳐 죽은 것이다. 기실 중학은 상조강에 닿았었다. 애기와 함께 조강을 넘은지 사흘째 되는 밤 영인은 나루터 쪽에서 들려오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에 잠을 깨었었다. 강가에 중학이 있었다. 이미 허벅지와 어깻죽지에 화살이 꺽인채 박혀 있었고 등에도 긴 검상이 있었다. 중학의 좌수검이 번득일 때마다 청병 서넛이 고꾸라졌지만 계속 밀려드는 청병을 전부 주살하기에 증학은 이미 지쳐 있었다. 결국 중학은 산채로 청병에 이끌려 온 몸에 밧줄을 걸고 배에 짐짝처럼 실려 하조강으로 되돌아갔다. 애기가 매일 쑥갓머리 산에 오르는 동안 영인은 이 사실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애기가 영인에게 살아있는 이유였다면 중학은 애기가 숨 쉬는 이유였을 것이다. 애기의 봉분이 마를 무렵 영인은 매향을 깎았다. 한길도 넘는 매향을 메고 조강으로 들었다. 이미 매향을 묻을 자리는 봐둔 터였다. 밤물이 차가웠다. 매향을 묻은 영인이 강심을 향했다. 먼 바다에서 교미를 하고 알을 까러 올라 온 숭어 떼가 왁왁 거리며 영인의 발을 치고 지나갔다.

▲ 조성춘
김포시청 교통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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