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영찬소설가
출산에 대해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제가 꿈에 보니 무슨 병 속에서 아이를 낳게 하더군요. 시험관 아기라고 하던가. 무슨 애 낳는 데 시험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자식 낳으려고 무척고생하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양반이 살았습니다. 양반이라고 해야 과거에 합격한 것도 아니고 논밭이 많은 것도 아닌 그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학문에 열중하는 것도 아니고 농사를 거드는 것도 아니니 하루하루 소일하며 살았습니다. 유일한 낙이 자식 낳는 일인데 이게 어찌된 것이 하룻밤 동침하면 덜컥 임신해서 아내의 배가 빌 때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낳은 자식이 무려 일곱이나 되었는데 모두 건강했습니다. 부귀다산(富貴多産)이라고 자식 많은 것은 좋은데 부귀는커녕 먹을 것이 똑 떨어진 거라. 할 수 없이 가까운 친척을 찾아 김포까지 왔지만 이사간 지 일 년이 넘는단다. 할 수 없이 크고 웅장한 기와집을 찾아 들어가 하룻밤 유숙하기를 부탁했습니다. 주인도 심심했는지 이야기를 나누는데 양반이 자식이 많은 것을 한탄하자 눈빛이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꿈이 좋아 귀한 손님이 오실 줄 알았지만 사실이구려.” 귀인은커녕 밥 빌어먹는 자기에게 귀인이라고 하니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양반을 데리고 밖으로 나오더니 멀리 보이는 들판까지 모두 자기 논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답이 많고 창고에 쌀이 그득해도 귀여워할 자식이 없으니 슬픈 일이오. 자식 보내려 첩을 여럿 두었지만 낳지 못했소. 문제는 내게 있는 거지요.그러니……” 주인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습니다. 즉 자기 첩이 셋 있는데 하룻밤만 동침해서 임신을 시켜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먹고 살만한 돈과 곡식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임신시키는 것이 유일한 특기이고 굶주린 일곱 명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오케이했지요. 졸지에 씨내리가 된 양반은 그날 저녁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상에는 쇠고기와 인삼등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는 녹용탕을 마시고 비단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둘이 밖으로 나오자 주인이 앞장서서 양반을 첩의 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미리 짰는지 첩은 곱게 화장하고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인은 첩의 방에 양반을 들이밀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씨내리가 된 양반은 주특기를 마음껏 발휘했습니다. 그곳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지낸 양반은 다음 날 아침 찾아온 주인의 뒤를 따라 두 번째 첩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세 번째 첩에게로 갔고 다시 첫 번째 첩으로 순회하니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양반은 굶주린 아이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가겠다고 하니 주인은 쌀가마니와 돈을 잔뜩 실은 우차의 고삐를 양반에게 쥐여주었습니다. 덜커덩거리는 우차의 소리를 들으며 꿈같은 보름을 회상했습니다. 아이들은 보름 동안 먹지 못해 너부러져 있는데 쌀가마니를 보고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오랜만에 웃음꽃이 피었지만, 씨내리 했다는 것은 아내와 자식들에게 비밀이었습니다. 아이들을 그 후에도 쑥쑥 태어나 열다섯을 넘어 스물에 육박했습니다. 그날 이후 열일곱 해가 지났는데 쪼들려 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악다구니를 쓰고 성년이 된 아이들은 혼인도 못 시켰습니다. 그런데 곱게 비단옷을 입은 청년 셋이 찾아왔습니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김포의 부호가 돌아가면서 생부를 찾으라고 유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양반은 난감했지요. 가난이 덕지덕지 붙었는데 씨내리로 낳은 자식이 찾아왔으니 말이다. 그러자 아들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나눠 받았으니 곧장 김포로 가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양반은 그대로 스무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김포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정착한 양반은 매일 첩들을 찾아다니며 안락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