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의 용기

중용은 배의 평형수와 같아
다투지 말고 서로 어울려 살아야 평화.
나무가 혹한에 맞서는 용기로
우리도 처절한 자기 반성으로 거듭나야

신도시 복판 사거리에 우뚝 솟은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솔내공원이 시작된다. 솔내공원을 거쳐 뉴고려병원 옆으로 산을 오르면 조그만 오솔길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등산길로는 너무 쉽고, 산책로로는 아주 어울리는 짧은 코스는 1시간, 길게 코스를 정하면 2시간쯤 소요되는 정든 길을 몇 년째 걷고 있다.

허산의 등산길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와 수시로 오를 때마다 이사 잘 왔음을 되새기곤 한다.
어느새 오솔길은 낙엽이 쌓이고, 바람이 불 때마다 끊임없이 나뭇잎이 떨어진다. 쉼 없이 떨구는 나뭇잎에도 아직은 노랗고 빨간 단풍잎으로 나무는 아름다움을 뿜어낸다.

어느덧 깊은 가을로 접어들어 노오란 벌판도 이제는 여기하나 저기하나 듬성듬성하다. 농부의 손길이 바쁜 추수의 계절이다. 벼를 잘라내어 쌀을 수확하고, 사과를 나무에서 떼어내고, 빨간 감을 떼어낸다.
추수란 무엇인가? 생명을 짜르고, 떼고, 꺾어내는 일이다. 사람의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생명의 희생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런 일상이고 평화이고 만족이다. 원시사화의 가족에 대한 개념도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족을 위해 가장이 한 마리의 양을 어깨위에 메고 오는 뻘겋게 피 묻은 모습도, 가족의 입장에서는 긴 겨울을 날 수 있는 양식을 가져오는 가장이 믿음직하고 좋아 보였을 게다. 그래서 한자어의 아름다울 美 는 양을 상징하는 羊자와 큰 어른을 상징하는 大자의 결합이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원시사회는 가족을 위해서는 깃발을 날리며 활을 쏘는 전쟁을 의미하고 있다. 집宀 에 돼지豕는, 집에 살고 있는 식구를 지칭하고, 族에는 旗(깃발)와 화살矢이 포함되어있다. 가족이란 개념은 이토록 살벌하다. 전쟁이란 필히 죽음이 따른다. 가족을 위해 죽이고 죽는 것이 가장이다. 옳을 義자는 羊자와 我자의 결합이다. 내가 가족을 위해 양을 잡아 가족의 양식을 어깨에 메고 오는 것은 옳은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양이 죽어야 내 가족이 살고, 내 가족의 생존이 올바르다는 인식은, 죽음을 함께하는 생존방식의 소산이다. 안중근 義士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척살한 것은 옳은 일이라는 말에도 죽임이 내재한 말이다.

가을의 추수도 생명을 앗는 행위이지만, 그것은 당연히 옳은 일 이라는 것에 이의가 없다. 한해를 갈무리하고 미진한 일들을 돌아보는 가을은 그래서 우울하기도 하고 감상에 빠지게도 한다.
그리 오래 끌던 세월호법도 합의를 도출했다. 이 가을로 모든 것 마무리되고 보다 밝고 명랑한 사회 분위기로 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세월호 평형수가 적어 배가 전복된 것처럼, 배의 평형수는 배가 한쪽으로 기울면 물이 반대쪽으로 쏠려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이다. 子思가 말한 중용(中庸)이란 무엇인가? 어느 쪽으로 쏠려 넘어지지 않도록 평형수 역할을 중용이라 한 것 아닌가! 극과 극을 지향하지 말고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보편성 있게 도리에 맞는 상황을 만들어 다투지 않고, 서로 보완해주며, 서로 밀고당겨주며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WIN- WIN하는, 잘 어울려 잘 돌아가는 세상이 중용의 세상이다.

내 가족의 이익을 극대화 시키면 손해보는 가족이 생기는 게 자연의 법칙이다. 욕심의 지향점이 돈과 권력에 눈 멀어 버리면,  닭 싸움장처럼 피 튀기는 피차간의 파멸만 초래한다. 가족도 사회도 국가도 중용을 중시해야 평화와 행복이 존립한다. 아직도 우리는 얼마나 뻔뻔한가! 아직도 우리는 얼마나 바보스럽게 살고 있나? 일본에 나라를 뺏기는 치욕도 있었고, 형제간 죽고 죽이는 전쟁도 치렀다. 지금도 우리는 불법유턴에, 불법운전을 다반사로 하면서 정치인들만 욕하고 있을 건가. 대기업과 밴드기업, 원청업체와 하도급업체간의 돈과 비리가 횡횡하면서 그들은 또 누구를 나무랄 것인가? 아들과 딸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냥 소통, 불통만 말 할 것인가?

단풍으로 치장한 나무는 조만간 헐벗은 나목이 되고 한겨울 모진 풍상 앞에 알몸으로 맞설 것이다. 우리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모두, 가족 앞에 떳떳하고 사회에 의로우며 이웃끼리 보듬고 아껴주는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한 처절한 자기반성과 자각이 있어야 할 때다. 겨울을 당당히 맞는 나목의 용기처럼, 내 옷부터 벗겨 흠결의 치부를 치료하고 사회에 당당하자.
모두 그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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