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明喆 동국대 교수(49·북변동·본지 편집위원)가 지난 3월20일부터 5월1일까지 중국·한국·일본을 연결하는 장보고 항로 2700㎞를 뗏목으로 탐사, 장보고의 해양개척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尹교수는 1983년 이래 대한해협 뗏목 학술탐사를 시작으로 2003년 3월까지 남한강 뗏목 종주, 울릉도, 독도간 뗏목탐험, 황해 횡단 뗏목탐사 등 6차에 걸친 해양 탐사활동을 통하여 육지위주의 우리역사에서 해양역사 속에서 우리민족의 발전모델을 찾고자 했으며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31일 제8회 바다의 날을 기념 정부 문화포장을 받았다.
尹교수는 지난 96년부터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민족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등 50여편의 학술논문과 14권의 저서를 저술하는 등 한국 해양사를 재정립하여 해양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진취적 기상을 고취함은 물론 해상왕 장보고의 업적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편집자 註>

조류는 뗏목을 북한 연평도로 밀고

26일 아침 마침내 뗏목은 장보고가 세운 법화원의 먼 바다 위에서 동진을 시작했다. 불과 250여km가 조금 넘는 황해중부 횡단항로는 손쉬운 항해라고 여기면서. 하지만 남향하는 해류대가 예상보다 너무 빨리, 그리고 강하게 우릴 덮쳐왔다. 바람과 물결이 제각각 부딪히면서 신경질적으로 뗏목을 뒤흔들어댄다. 태풍을 여러 번 맞아보았지만, 이번은 왠지 다르리라는 예감이 엄습해왔다.
밤이 되면 파도는 유독 심해진다. 홍선표가 지친 몸을 이끌고 밥을 짓고, 찌개를 만들어 놓았지만 나는 이내 숟갈을 놓고 물러나 앉는다. 2평 남짓한 유한공간에 5명이 오그리고 앉고, 기댄 채 눕는다. 진저리치도록 추운 또 하루의 밤이 지나갔다. 채 덜 익은 햇살에 온 몸을 녹여보려 문을 열다가 기겁해 주저 앉는다. 찬 바람 줄기가 볼따귀를 때린다.
‘퉁퉁’ 소리가 들린다. 칠도 안한 육중한 중국의 나무배들이 나타났다. 컵라면과 집게 조기들을 은밀하게 교환한다. 뗏목 위에 실려 있는 사탕수수대나 ‘엔지’ 같은 과실도 고대에는 일종의 교역품이었다. 이렇게 육지 사람들과 관리들이 모르게 바다의 여기저기서 밀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한국의 바다에 들어섰다. 서해연안을 타고 북상하는 해류와 또 조류대가 겹친 탓인지 물결은 바람을 밀며 뗏목을 북으로 밀어붙인다. 초조하게 시간은 흐르고, 북에는 북한이 있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경도상으로는 영락없이 연평도 선에 있다.
파도가 더욱 높아진다. 평균 4∼5m정도이다. 갑자기 우두둑 소리가 어둠을 헤치며 들린다. 바람이 세서 돛대가 견디다 못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비상 소리와 함께 본능적으로 뛰어가는 대원들, 한밤중에 실존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어둠과 랜턴불빛, 찢어진 돛, 다급한 목소리들이 뗏목 위를 가득 채운다. 앞 돛을 간신히 내려 돛대를 원위치로 하고, 아예 주돛마저 내린다.
또 하루가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 며칠째 강한 바람에 야금야금 찢겨가던 대장기의 남색단이 마침내 터져 나가면서 너덜너덜해졌다. 해도를 보니 소청도 30마일 지점이다. 이젠 아무래도 항해를 끝내야 할 것 같았다.
덕적도를 향해 예인되는 뗏목 위로 아침이 내려앉는다. 이제 탐험의 1구간인 중부횡단항로는 끝이 났다. 황해는 아늑한 내해만은 아니고, 때로는 더 어려운 항해술과 조선술이 필요하고, 인간의 의지가 요구되기도 하는 바다였다. 장보고 이전에도 그랬듯이 장보고는 황해를 그들의 바다로 만들었던 것이다.

인천항에서 古代 교역선 경험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 인천시민들의 환송식을 뒤로한 채 장보고 호는 다시 바다로 나갔다. 고대항해가 그렇듯이 우린 한동안 육지에 상륙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보고, 한편으로는 뗏목을 수리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적재했다. 만약 교역선이었다면 물건들을 팔고, 다시 다른 나라로 가서 팔 화물들을 적재했을 것이다.
뗏목은 안흥량을 거쳐 당진 서산을 지나 비를 맞으며 서천항에 도착하였다.
이 항로는 이미 선사시대부터 활용되었지만,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 동아지중해 교역권이 활성화되면서 중국지역과 일본지역의 배들도 오고가던 항로였다. 후삼국시대에는 복지겸, 박술희같은 해상세력들이 웅거하던 거점이기도 했다.
서천은 금강하구에 있다. 660년 우리처럼 성산 앞바다를 출항한 13만의 대군은 황해를 건너 일단 덕적도에 기항하였다가 신라병선과 함께 남진하여 이곳 금강하구로 들어와 대규모 상륙작전을 개시하였고, 수도인 웅진(공주)를 함락시켰다. 뱃길과 항구가 한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였던 것이다.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격돌한 바다

뗏목은 변산반도의 위도 옆을 멀리 보면서 격포항으로 들어갔다. 죽막동의 그 특이한 벼랑이 멀리서도 시커멓게 보인다. 환영행사를 마친 대원들은 모두 죽막동 수성당으로 갔다. 이곳에서는 제사와 관련한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제 중국제 일본제 유물들이 골고루 발견된 동아시아 고대의 해양제사유적지이다. 뱃사람들에게는 뭍사람들이 모르는 불안을 해소하고 기원을 비는 그들만의 신앙이 있다.
제사를 지낸 탐험대는 다시 바다로 나와 남진한다. 섬들과 섬들 사이를 지나친다. 후삼국시대 때 능창이라는 해적이 활약했고, 왕건과 견훤의 군대가 격돌한 바다이기도 하다. 그 시대는 진정 해양세력들이 역사의 주인이었다. 결국 최후의 승자인 경기만 해양세력인 왕건은 통일고려를 세웠다.
거품과 소용돌이가 치는 울돌목을 어렵게 지나 보길도 노화도 같은 크고 작은 섬들 사이를 돌아 들어가니 물결이 잦아지면서 푸른 산을 간직한 완도가 나타난다. 1200여 년 전에 장보고가 청해진에 본영을 두고,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한 곳이다.
완도지역은 모든 무역선이 거쳐가는 물류의 한 중간에 있었다. 황해중부를 건너와 남쪽으로 연안항해를 해서 신라의 금성(경주)이나 제주도 일본열도로 가는 선박들, 중국의 강소나 절강지방에서 먼 바다를 건너온 선단들, 반대로 일본에서 중국으로 가려고 하는 선박들이 거쳐 갈 수밖에 없는 물목이었다. 장보고는 이곳에서 당나라에 살고 있던 재당신라인들, 재일신라인들, 본국신라인들을 하나로 조직화하여 모든 항로를 장악하였던 것이다.
이틀 동안 분주하게 섬주변을 조사하는 한편 항해준비를 철저하게 했다. 찢어진 돛을 꿰매고, 중국제 노를 버린 대신 완도 노로 대체하고, 용골도 튼튼한 것으로 박았다. 다음날 장보고호는 제주를 거쳐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돛을 올린 채 옛 청해진을 출항하였다.
고요함을 동반한 태풍이 덮쳐왔다.
완도를 출항한 장보고호는 탐라로 향하였다. 밤새 노를 젓다가 연해에서 예인하여 남으로 돌아 대포항에 입항하였다. 장보고 선단들이 머물렀을 가능성이 큰 항구라는데, 1200년의 역사는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법화사에 머물면서 대원들은 출항준비를 다시 했다. 항해자들에게 이 섬은 환상의 섬, 생명의 땅이었을 것이다. 강한 비와 자욱한 안개를 끝내고 난 참이라 날도 개고 바람도 안정적일 것으로 예측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바람이 북쪽에서 내리 꽂힌다. 마치 한라산의 모든 숲 바람이 통째로 몰려오는 것 같다. 남쪽으로 밀리던 뗏목은 마침내 정지했다.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금 잘 나가는 듯하더니 파도가 높아진다. 왜 그럴까?
라디오 소리가 건조하게 들린다. 태풍 구지라가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단다. 난감한 일이다.
바람 방향만 같다면 우린 태풍이 불어도 괜찮다. 안전보다 성공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바람의 방향을 예측할 수 없는 우리는 머리들을 싸매고 각자 대응방법들을 제시한다. 하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설사 알았다 해도, 그저 마음 편하게 먹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 만을 경험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뗏목이 남서쪽으로 밀린다. 최악의 상황이다.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동중국해를 넘어갈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고생여부가 아니라 성패가 심각하게 다가온다.
며칠 째 우린 갇혀 있다. 얼굴 색깔들이 변해 있고, 몇 시간씩 말없이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태풍이 지나면서 폭풍이 몰아치고, 그러다 보면 또 폭풍이…. 그동안 몇 번씩 돌면서 온 바다를 다 헤집고 다닌 것 같다. 제주도를 향해 다시 북상하기까지 하였다.
제비들이 날아와 뗏목에 앉고, 한 마리는 선실 안에 들어와 잠시 몸을 녹였다. 그의 떨리는 눈빛에서 시신으로 떠다니는 식구들의 환영이 비춰진다. 파도 위를 갈녹 빛 해초들이 떠다니고, 그 속에 따개비들이 달라붙어 파도를 견딘다. 장보고도 이런 상황을 경험했을까? 아마 더했겠지. 역사란, 삶이란 이렇듯 진지한 거로구나.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출항한 지 12일째. 지금 오도열도를 바로 앞에 두고 있다. 원래 목적지는 큐슈의 하카다항이었지만, 이미 제주도로 올 때 난 오도열도가 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게 역사이니까. 다만 남이나 북이냐의 문제, 그리고 시간이 문제였는데, 이제 장보고 호는 남쪽의 한 섬을 향하여 돌진하고 있다. 어제부터 강한 서풍을 동반한 폭풍이 우릴 덮쳤다. 주돛을 내리고 앞돛만을 올리고 항해해왔다. 물결이 덮여 나가기는커녕 선실의 창문을 뚫고 물결이 들이쳤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이미 예측하고 있었고, 서풍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준비해 왔다.
등대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더니 동네 고깃배들이 앞뒤로 왔다 갔다 한다. 내일 새벽에 상륙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항진했다. 바로 앞에서 해벽이 시커멓게 몸을 드러낸다. 이대로 돌진하다간 산산조각이 난다. 97년에 흑산도 상륙할 때가, 그리고 발해 1300호의 최후가 생각났다. “빨리” “서둘러” “내려” “앵커” 긴박한 소리들이 어지럽게 난무한다. 공포감이 휩쓴다. 뗏목을 처음 경험한 KBS 역사스페셜팀 김신호 기자의 얼굴이 랜턴 불빛에서 일그러졌다.
13일째 02시 10분, 달빛 하나 없는 밤에 장보고호는 나루(奈流)섬 250m 전방에 닻을 내렸다. 상륙을 불허한 일본의 태도로 만 안에서 2일 동안 억류(?)돼있던 우리는 5월 3일 08시 강제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한국정부와 일본 해상보안청, 우리외교공관 등과 여러 차례 교섭을 벌인 끝에 그날 14시 무렵, 일본주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나루시마항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공해상에서 우리 무궁화에 예인돼서 5월 4일 08시 제주도 대포항으로 귀항하였다.
이렇게 해서 장보고뗏목 역사탐험은 끝이 났다. 우리는 장보고와 그들의 바다를 역사의 먼지 속에서 끌어내어 다시 물결 위에 띄워놓았다. 그들의 꿈이 다시 한번 21세기에 꽃피기를 절절히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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