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역사 탐방/김기열 박사

김포역사 탐방
손돌공 사망 제776주기가 맞다

김기열 박사

<지난호 계속>
김포시는 해마다 음력 10월 20일이면 거시적으로 손돌묘제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해가 1232년이므로 금년 2008년은 손돌 사망 제776주기(2008-1232=776)가 되는 해이다. 고종이 천도한 다음 해를 손돌의 사망년도로 보는 견해는 전설에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1977년에 세운, ‘舟師孫乭公之墓’(주사손돌공지묘)라고 전면에 새긴 비석의 뒷면에 744주기라고 한 것은 745주기(1977-1232=745)로 고쳐야 옳다. 금년에도 지난 10월 20일에 “제775주기 주사 손돌공 진혼제”를 올렸다. 금년은 2008-1232=776주기가 맞다. 이를 고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진혼제는 ‘무형의 문화유산’ 이라는 명목으로 국가 또는 도나 시지방문화재로 지정 받아 거시적(擧市的)인 대제로 승화시켜야할 것이다. 문화재 지정은 거시적으로 하는 이 행사의 명분을 얻게 될 것이다.

고려사절요(고종 19년 7월조)의 기록을 보면, 강화로 천도할 때 장마비가 열흘이나 계속되어 진흙길에 발목이 빠져 인마가 쓰러져 죽어갔으며 고관이나 양가의 부녀들이 맨발로 업고 이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왕이 이런 여름철 비바람이 잦은 시기에, 썰물 때 갯벌이 많이 드러나는 곳을 도하 시기 및 도하 지점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천도는 국왕 천도의 예행연습(豫行演習)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위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 의하면, 갑곶나루는 강화부 동쪽 10리(통진현 산천조에는 통진현 서쪽 9리)에 있으며, 승천포는 강화부의 북쪽 19리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강화 내에서 비교적 거리가 짧은 갑곶진을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전시에 임금이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대사여서 왕에 대한 경호는 철저히 진행되었을 것이나 국왕의 행차를 공개적으로 실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국왕이 쉽게 이동하기 어려운 갯벌을 건너다가 몽고군에게 잡히기 쉬운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기에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고종 19년 7월(또는 6월)의 천도 때 실제로는 조신(朝臣)만 보내고 국왕이 가는 것처럼 진행한 천도의 예행연습을 하였으며, 위의 고려사절요(고종 19년 7월조)의 기록과 같이 천도할 때 인마의 손실이 있는 등 문제점이 드러난 여름철과 썰물 때 갯벌이 많이 드러나는, 때와 장소를 피하여 고종은 개경에서 3개월 넘어 은신하고 있다가 10월 20일에 잘 알려져 있는 강화의 승천포로 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여지도서의 기록대로 계획은 몰래 민간의 배를 타고 썰물을 이용하여 갑곶진에서 가까운 강화의 광성진으로 가려고 하다가 잘 못되어 썰물 때도 갯벌이 없는 염하강을 흘러가며 강화쪽 손돌목 부근에 당도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갑곶진으로 와서 갑곶진에서 가는 물길을 택한 것은 강화 내에서 갑곶진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짧기 때문이기도 하였으며, 몽고군들은 수전(水戰)에 약하다고 믿고 있었기에 갯벌이 드러나지 않는 곳을 택하여 썰물을 이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고려왕만 다르지 갑곶진에서 출발하여 10월 20일 도하하면서 손돌이 죽었다는《여지도서》의 기록과, 손돌이 10월 20일에 죽음을 당했다는《동국세시기》및《열양세시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고려사에 고종 19년(1232) 7월에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사 6월조에도 강화도로 천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천도가 6월인지, 7월인지 헷갈리게 하고 있다. 이렇게 헷갈리게 기록하였다는 사실은 이때의 천도는 말로만 하였지 실제로 한 천도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또한 고려사에 고종 19년의 1월부터 12월까지 월별로 몽고와의 관계 기록이 있는데, 10월에만 몽고와의 관계 기록이 없다. 이는 국가의 중대한 기밀(실제로 천도한 사실)이 있어 기록 전체를 말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전호(前號)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다.

손돌의 무덤은 지금으로부터 248년 전에 나온《여지도서》에 “무덤의 형태가 완연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손돌의 무덤이 있었으며, 지금으로부터 142년 전인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군대를 물리친 양헌수 대장이 남긴 52일간(음력 9월 3일 - 10월 26일까지)의 참전 기록인《병인일기》를 보면, 김포에서 강화도로 상륙작전을 개시하기 2일전인 음력 9월 28일에 손돌묘에 가서 무운을 빌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손돌의 무덤이 오래 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보이듯 당시에 묘가 실재하였고, 사람들이 그 묘의 주인을 손돌로 인식하였다는 것은 손돌이 실존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한다.

<본지 편집위원·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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