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역 서정임초저녁 뜬 달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발밑 편자를 달고 빠져나온 개찰구 바람이 스산하다달리는 차창 밖불 꺼진 연탄 같은 연밥이 고개를 꺾고 있다 푸른 색 플라스틱 간이의자처럼 펼쳐있던 연잎들 연밭에 나뒹굴고 있다내가 너에게 머무는 동안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어떤 미지였을까 한바탕 어울린 연들이 피운 꽃은 얼마나 순도 높은 색이었을까역은 언제나 반월역이다서로를 온전히 내보일 수 없는 우리는 갈구하는 목마름이 깊을수록 더욱더 다르게 굴절하는 프리즘이다거울 속 쓸쓸함이 차오른다뿌옇게 시야를 가리는 연의 잔상을 닦아내는 동안
절집에서 김황흠 부처님은 안 계시고문턱 턱 베고 누운 누런 개가심드렁히 코를 곯고 있네텅 빈 놋그릇엔햇빛만 마지못해 차 있고먼 바람 소리는풍경하고나 자처 울며 노는데그런 거 아닐까 삶은무주공산의 저문턱을 번질나게 넘으며부처 대신개가 핥고 난 가난의놋그릇이나 훔치어보는 것그 속에, 기울어가는햇빛 몇 올로 갇히는 것 절집에서/김황흠 (시감상) 무언가에 집착하여 그것을 쫓다 보면 그 끝에서 만나는 것은 가끔 무언가가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알게 될 때가 있다. 목표를 갖는 것은 그것이 목표에서 끝날 때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결과
열일곱 살 이우디 정면을 통과한 볼 붉은 소년과흰 눈빛과 눈빛이 만나 분홍에 감염된 소녀 봄이 봄을 읽는 소리 화창한 늘 공중을 떠도는 바람 한 점과반드시 사라질 그대 파랗게 번지는 푸른 기억의 교집합 말랑한 눈망울이 긍정한 그것은 유토피아평생 꺼내 쓸 상냥한 한 줌 빛 즉흥적이고 찬란한 연둣빛 수혈하던 그 무렵 눈꺼풀과 속눈썹 사이 별빛 소나기 매혹적인 첫 키스에 깨진 봄 그대 열일곱 살(시감상)열일곱 그 시절, 찬란했던 시간이었다. 질풍노도를 몰고 다니며 일상조차 한 끼 웃음이 되는 시절이었다. 철학과 서정이 공존하는 시대에 한
가만히, 봄 박경순가만가만 오고 있는 봄나무며 꽃이며 가만두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거나 아무 말 없이 꽃샘의 질투 서린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고개 내밀고 빼꼼 눈뜨는 움츠렸던 망울들 버짐 피듯 번지는 유채색 등불어떤 대책을 세우거나 손을 쓰지 않고 짐짓 그대로. 너스레를 떨지 않아도아랫녘에서 올라오던 온화한 문장이 뚝 잘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곰곰이 당신을 채록하는 나와 나를 채비하는 나와, 우리 놓아두면 올 것을(시감상)섭리는 우주 질서의 운행 법칙이다. 세상은 내가 어떠하든 관계없이 돌고, 다시 또 도는 법이다. 그 질서, 깨트리지
봄의 초입이지만 꽃샘추위를 두어 번 겪고 나면 계절의 끝자락이 보일 것이다. 겨울의 외곽을 서서히 무너뜨리며 다가온 계절의 봄바람은 향긋하고 아릿한 연둣빛으로 들판을 채록하여 우린 가끔 작년의 봄을 기억하며 그리워할 것이다. 센바람이 물러간 척박한 땅에 솟아나는 파릇한 봄의 전령들이 온천지를 점령하고 겨우내 얼어있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것이다. 소생蘇生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한 생명의 재생과 움트는 것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막혀있던 가슴의 한 부분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봄은 그런 것이다. 이 무렵 자
불타는 숨바꼭질 추프랑카 봄은 장님 누드처럼 남아돌고 또 한 번 넘치는 반원과 반원을 맞추어 볼까요 장님의 누드는 뒷면에서 그리는 것 엉덩일 누르면 솟아오르는 초상화, 장님 초상화는 배꼽 속 손가락으로 휘저어요 색색 매니큐어 칠한 밀랍 같은 잠이 무지갤 띄울 때까지 배꼽이 불타는 숨바꼭질 품고 있어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의 발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볼까요 가만가만 걷다 보면 가지런한 눈썹 반듯한 이마 볼 코 당신의 가장 은밀한 곳 만지는 기분, 입술이군요 붉은 색, 담장 위의 빨간 꽃, 꽃 피는지 지는지 벌려봐야겠어요 스르르
차경(借景) 이난희충분하다돌다리와 돌다리를 잇는 여백이면 노을의 보폭을 가늠할 수 있겠다물고기의 표정으로손바닥에서 가지고 놀던 소란을 공중에 매달아 놓는다없는 어깨를 빌려 바람이 잠든다따뜻해혼잣말을 다 들어주고 가는 구름의 발밑에서 목이 쉰 버드나무미끄러지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 발목에 힘을 준다반달을 보며, 반달을 기다리는 사람이 웃고 있다단골집 하나 가지듯충분하다* 시집『얘얘라는 인형』에서 (시감상)경치를 빌려온다는 의미의 차경. 풍경을 빌려온다는 것은 지금 내게 없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든다는 말이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느
여기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있다 얼마의 참회가 있으면속과 겉이 같을 수 있을까 아직도 멀었다는 듯아직도 모자란다는 듯이 엄동, 참선에 든 저 설승(雪僧) 얼마나 더 많은 업보를헐었다가다시 짓기를 해야 진정한몸과 마음을 얻을 수 있을지 이미 몸과 마음이 희디희거늘오늘도 끝없는묵언 수행 중인 저 불심 삼천 억겁의 바람과 구름의 합이 있어야숨을 얻을 수 있다는 생령(生靈) 눈에 보이나 보이지 않는만져지나 허상인 저 각(覺)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존재하는억겁의 후에 나일 수도 있는저 계(界)(시감상)천부경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삼천
주상절리 최종월섬이 그리운 건저만치 홀로 서 있기 때문이다늘 그 자리에 머물기 때문이다더 그리운 건내가 이 자리에 그냥 있기 때문이다절벽으로 머물러 바라보기 때문이다(시감상)섬을 보다 문득 섬이 외로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섬도 나를 보면서 바라보는 내가 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늘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은 언제든 그리워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변함이 없다는 것. 변하지 않는다는 것. 정말 어려운 일이다. 타인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천 년을 같은 자리에서 우직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헌옷론 이둘임고개 떨군 꽃, 조기 폐경한 그녀를 닮았어요 사연도 많지만 한때 그녀의 날개가되어 발걸음에 리듬 실어주던 기억은 구겨진 꽃이 되었죠 내가 그녀인지 그녀가나인지 언제부터인가 덤불 속 시들어버린 꽃 되어 시야 밖으로 버려졌어요 세상의이쪽에서 저쪽 의류 수거함에 던져지는 마지막 장면은 상상하지 않을래요 마른바람과 햇살에 낡아지는 오후 컴컴한 상자 밖을 꿈꾸는 날들이 쏟아지고 내가 그녀인지 그녀가 나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당신의 환상을 수거하고 싶어요(시집/ 우리 손 흔들어볼까요 23쪽) 2023.05(시감상)때론 헌 옷 수거
큰이모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았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밤, 늦은 시간에 찾은 장례식장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섞여 고인을 추모하며 회한의 한 자리를 달구고 있다. 3일장. 돌아가신 날과 다음 날, 그다음 날 새벽이면 고인의 흔적은 부연 연기가 되어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갈 것이며 삶에 지친 우리는 어느 틈에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내 어릴 적 장례에 대한 기억은 곡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이 같이 메는 꽃상여와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와 슬픔에 겨운 사람들의 눈빛과 더불어 만장으로 흩날리던 만국기에 대한 풍경들이다. 곡소리와 꽃상
그로테스크 심상숙 천만에, 나는 호두껍질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으면서도 나 자신 무한하기 그지없는 어떤 공간의 (주인)으로 여길 수 있네 - 『햄릿』2막 2장*빛살 쏟아지자, 고층아파트가 뚝 꺾여 거꾸로 대롱거린다여우비 떨구고 간 빗방울 하나, 화단 감나무 이파리에 새소리통유리창 쏟아진다*이 부분은 로센크론츠가 덴마크가 마치 감옥 같지 않겠느냐고 하자 햄릿이 했던 응답이다. 즉,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문제이다.(시 감상)세상에 그로테스크 않은 것이 있을까? 탄생과 소멸, 어둠과 낮, 비와 땡볕, 그
오래 전에 읽은 이향봉 스님의 수필에 나오는 말이다. 20년도 넘은 이 말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이 말 속에 담긴 의미가 결코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향봉 스님은 시집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미움은 타인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가르침. 얼핏 눈으로 읽으면 평범한 말인 듯하다.하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 이해라는 단어 하나, 용서라는 단어 하나, 정말 우리가 실천하고 사는지 냉정하게 되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내가 그래요’ 할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미움은 나로부터 비롯된 일이라는 말 속의
점點 이규자 밉고 용서가 안 된다며고해성사 간 친구신부님은 백지에 점 하나 그리고“이 백지에 무엇이 보이나요?”점 하나가 보인다는 친구에게“앞으로 점點을 보지 말고 백지만 보세요.”백지에 점點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나평지인 줄 알았던 길에서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미움과 용서, 미련함을 가슴에 청하며이젠 점도 보아야지 다짐하지만아직도 백지와 점點을 구분하지 못한다(시 감상)변상증(變像症)이라는 말이 있다. 심리적인 상태에 따라 물체의 모습을 본인이 보고자 하는 것으로만 보는 현상을 말한다. 백지를 볼 것인지, 점을 볼 것인지는 선택의
몽골반 박위훈 물방울에 갇힌 알몸의 언어들이 천정에 맺혀 웅웅거리는 황토옥천탕,양수 속 태아의 몸짓처럼 물방울들이 자진하며 물꽃을 피우는 물의 감옥 너머젊은 아버지가 아이의 등을 밀어주고 있다 아이의 등과 엉덩이에 핀 암청색꽃 몇 송이 보았다 나도 얼마 전까지 불알을 덜렁거리며 아이가 된아버지의 등을 밀어주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 활짝 꽃을 피운다는대나무처럼 크기가 다른 꽃송이들을 몸에다 자꾸자꾸 게워내던 아버지, 꽃이지만 다른 냄새가 났다 누대의 핏줄이 잇닿아 있음을 꽃으로 말해주는 저 푸른반점의 계보(시 감상)몽고점이라고도 하며
관촉사 윤장대* 김효운 까막눈이시다물집 잡힌 발가락이 꿈 밖에 나와서도 쓰리다문자에 기대지 않고는 한 발짝도 올 수 없는 불경책 수억년 돌아 품에 안기고긴 손에 닿은 판도라는 어둠에 갇히고품고만 있어도 위안이 되는지갓난아기처럼 끌어안고 사신다내 이름 석 자도 어디에 있을 듯하여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 끌어안고꿈속에서도 윤장대를 돌리시는지같은 말만 되풀이하신다금강경을 넣고 밤새 윤장대를 돌린다지금도 엄마는 자꾸 나를 끌어안으신다*글자를 모르거나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신도들을 위해 만들어진 불구佛具로 돌릴 때마다 읽는 것과 같은 공덕
새해가 시작됐다. 창밖에는 눈 대신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겨울 눈과 겨울비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다. 눈이 내리면 더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바뀌는 것 같다. 같은 비를 봐도 더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겨울이라는 낮은 온도의 체감 때문이 아니라 이 음습한 계절이 주는 알 수 없는 바람의 무게가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해 겨울도 그랬다. 추위 때문에 외출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온통 텅 빈 것 같은 도시와 징글맞게 귀를 파고드는 외국
버스3 -이방인 박미림 타국에서 살아남는 법을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을 터교통 카드를 찍고필사적으로 프레스를 찍었을 어깨 위로영하 15도 송곳 바람이 터를 잡았다너무 멀리 왔다고 후회한 순간공장장의 육두문자는 월급 통장에 꽂힌다웃자란 손등의 흉터가 순해지고 있다손톱에는 자잘한 때가 물들어 가고 있다불량이 유독 많은 날은새참 대신 모멸감으로 배를 채우고잔업이 있는 날은 통장을 꼿꼿이 펴인출 없는 잔액을 확인한다뻑뻑한 하루가 간다눈물 스윽,버스로는 갈 수 없는 고향핸드폰 속에서 출렁이고 있다바다 건너가는 길 멀기만 하다 (시 감상)연말,
냉장고 강성남 할머니, 들어가 계세요오냐, 그때까지 썩지 않고 있으마. 썩지 않을 만큼의 추위가 방치된 노인온도조절 장치가 소용없다집을 비울 때마다 플러그를 뽑으신다 전화 받지 않는 아들에게 재다이얼을 누른다속을 잘 닫지 않아 눈물이 샌다텔레비전 켜놓고 주무시는 냉장고들판 건너온 바람이 너른 집을 웅웅 돌린다지난번 사다 드린 고등어가 악취를 풍긴다코드 빼면 죽어요, 할머니도청에서 나온 복지사가 락스로 속을 닦는다 저물녘이면 문밖으로 귀 기울이는 냉장고손자들이, 명절 때 모셔간 노인을 다시 보관한다한번 닫아놓고 몇 달 동안 열어보지
당신의 행방 서상민당신을 찾으러 길을 나섰다돌아올 것을 염두에 두지 못해길을 잃었다허기처럼 빛나는 이팝나무 꽃잎과옷소매에 묻어온 수크령들과눈 덮인 벤치에 앉아잠시 울었다당신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했고나는 꼭 한마디 할 말이 남았지만늘 처음과 끝의 중간쯤에 나는 서 있었고돌아와 그곳에 두고 온 신발을 생각했다(시 감상)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도, 나와 다른 타인이라도, 내 속의 나일지라도 ‘당신’이라는 것은 늘 존재한다. 때론 친구처럼 때론 데미안의 두 주인공처럼 끝없이 서로에게 위안을 주는 관계, 삶은 그런 ‘당신’이 필요할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