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나요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큰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치매 노인의 뒤섞인 기억을 아름답게, 웃기게, 슬프게, 감동적으로 그린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 2019)의 마지막 내레이션이다. 1970년대 유신의 칼날에 사랑하는 이를 억울하게 잃고, 자식이 당한 뜻밖의 불행에 평생 마음 아파하면서도 꿋꿋하게 살다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한 사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고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 한다. 여기에서 오버랩되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소설 『인생』(위화, 푸른 숲, 2012)의 주인공 푸구이다.

푸구이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다. 마을에서 제일가는 대지주의 아들인 푸구이는 노름으로 집안의 전 재산을 탕진하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모님과 아내와 함께 열심히 살지만, 중국 내전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전쟁터에 끌려갔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간신히 살아 돌아온다. 그 이후에도 그와 가족의 삶은 순탄치 않다.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만하면 찾아오는 불행은 느닷없다. 푸구이는 결국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남는다. 그는 생의 막바지에서 자기의 삶이 평범하고 괜찮은 삶이었다고 말한다.

내 한평생을 돌이켜 보면 역시나 순식간에 지나온 것 같아. 정말 평범하게 살아왔지. (...)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pp.278~279)

동의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 헌혈하다 온몸의 피를 뽑혀 죽고, 벙어리 딸이 좋은 신랑을 만나 행복하게 사는가 싶었더니 아이를 낳다 죽고, 사위 역시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손자는 급사한다. 이런 인생을 어떻게 평범하고 괜찮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행한 푸구이의 삶을 통해 작가는 ‘인생이란 이렇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괜찮다는 말은 괜찮지 않다는 역설이 아닌가 말이다.

다시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돌아가 본다. 아들은 치매로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지 묻는다. “대단한 날은 아니고 나는 그냥 그런 날이 행복했어요. 온 동네가 밥 짓는 냄새가 나면 나도 솥에 밥을 앉혀 놓고 그때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던 우리 아들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가요. 그럼 그때 저 멀리서부터 노을이 져요.” 퇴근해 오는 남편과 아이를 안고 함께 석양을 바라보는 모습을 떠올리며 그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말하는 장면은 눈물 나게 아름답다.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슬픈 생을 살았어도 한때 행복했던 기억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는 거구나.

푸구이 노인에게도 살면서 언제가 제일 행복했는지 가만히 물어본다. “저는 복 같은 건 바라지 않아요. 해마다 당신한테 새 신발을 지어줄 수만 있다면 그걸로 됐어요.”(p.111)라는 아내의 말에 가족끼리 매일 함께 할 수 있다면 복 따위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고 생각했던 때일까. 남의집살이를 보냈던 딸을 도로 업고 집으로 돌아와서 “우리 모두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펑샤를 돌려보내지 않겠소.”(p.127)라고 했을 때 배시시 웃으며 눈물 흘리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을 때일까. 해질 무렵이면 아픈 아내를 업고 나가 슬슬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나누던 때일까.

특히, 푸구이의 기억 중 가장 생생하게 묘사된 장면이 있다. 밥 지을 솥까지도 회수해가던 대약진 운동의 시절, 흉년까지 겹쳐 온 마을이 굶주림에 허덕이던 때, 고구마 하나 가지고 싸움이 나고 물로 배를 채우던 때였다. 아내 자전이 친정에 가서 쌀 한 자루를 얻어 가슴 속에 숨겨 온다. 마을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하며 죽을 끓여 먹는다.

죽이 다 끓고, 드디어 우리 네 식구는 식탁에 둘러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죽을 마셨다네. 내 평생 그렇게 향기로운 죽은 처음이었어. 그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군침이 돌 정도라니까. (p.179)

행복과 불행은 따로 떼어 가를 수 없는 듯하다. 푸구이의 삶은 때로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다. 그의 삶을 돌아보면 순식간에 지나온 것처럼 꿈과 같지만,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순간이 있었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운명의 여신은 거대한 수레를 끌고 늘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간다. 그래도 행복하지 않은 삶이란 없다. 눈부시지 않은 인생이란 없다. 잊지 못할 단 한 장면, 한마디의 말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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