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정치·문화 중심지였던 옛 통진ㆍ김포 관아 복원 노력

조선시대 일성록에 기록된 통진과 김포 관아

1794년(정조 18년) 일성록(日省錄ㆍ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에 김포와 통진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경기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은 채홍원이 1794년(정조 18년)에 추생 지역인 양천, 김포, 부평, 통진, 교하 등각 지역의 전 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서인 서계를 바쳤다.

「경기 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暗行御史)와 적간(摘奸) 나간 사관(史官)이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올립니다. 양천(陽川), 김포(金浦), 부평(富平), 통진(通津), 교하(交河) 등 5개 읍에 파견된 어사(御史) 채홍원(蔡弘遠)이 서계(書啓)를 올려 보고합니다.

김포 군수 유한준(兪漢雋)은 다스리는 것을 진실로 근면하게 갈고 닦고 있지만 힘쓰는 것이 오로지 강건하고 굳센 데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재정(財政)은 비록 잘못된 바가 없지만 조적(組積)의 폐단은 실로 감당해 내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대개 구관(舊官)의 허록(虛錄)을 아울러 이때에 독촉하니 혹은 족징(族徵)하는 일도 있습니다. 마을 사이에서 자못 백성들의 원망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통진 부사 김이용(金履容)은 사람됨이 물정을 잘 모르고 어리석어서 읍(邑)을 제대로 다스리는 일을 감당할 만하기 어렵고, 실제 일을 처리한 것에도 잘못된 것이 많으며, 이향(吏鄕)이 농간을 부리는 것에 오로지 내맡겨두고 있습니다. 재결(災結)의 처리에서는 군현(郡縣)의 농토의 진황(陳荒)을 두루 살핀 것이 없고, 초호(抄戶)하는 일에서는 경내(境內)의 궁박하고 잔약한 형편을 두루 살피지 않았습니다. <중략>

이 밖에도 견휼(蠲恤) 조건으로 응당 시행해야 할 절목(節目)에 맞지 않게 한 것이 많고, 군포(軍布)와 군향(軍餉)은 초호(抄戶)할 때 분등(分等)하는 것과 따로 시행하지 않고, 대전(代錢)과 대곡(代穀)을 대부분 하리(下吏)가 농간을 부리는 대로 내버려두어, 한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떠들썩하게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괴한 정사(政事)는 예전에 전혀 듣지 못한 것입니다. 신(臣)이 출도(出道)한 후에 한편으로는 간사한 짓을 저지른 이향(吏鄕)을 형률로 다스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흩어질 백성들을 효유(曉諭)하여 하여금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하였습니다. <중략>

고을의 백성들이 신(臣)이 출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뜰에 가득 찾아와서 호소하기를 “덕포진(德浦鎭)의 향미(餉米)는 봄에는 매 1석(石)에 3냥씩 돈으로 받아먹었는데, 지금은 미(米) 16두(斗) 5승(升)으로 납부하게 하니 이것이 살아나가기 어렵게 만드는 한 단서입니다. 이것은 비록 궁벽한 백성의 물정을 모르는 자잘한 말이기는 하지만 세세하게 본정(本情)을 궁구하면 또한 그리 괴이한 것도 아닙니다. 대개 김이용(金履容)이 범한 것은 모두 불법적인 것이니, 그 죄상(罪狀)을 논하여 무거운 형률로 다스리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행정·정치·문화 중심지 통진ㆍ김포 관아

조선 시대 관아(官衙; 관원들이 정무를 보던 건물)는 관리들이 근무하던 군(郡) 단위 행정기관으로 통진관아는 1만 7,845㎡ 규모로 당시 보기 드문 큰 관청이었다.

통진도호부(通津都護府) 통진 관아는 김포 북서부 쪽의 행정을 담당해 왔으며 현재 김포시 월곶면에 조선 시대 관아건축물인 통진이청(通津吏廳)의 일부만 남아 있다.

통진도호부 옛 관아도 / 중앙도서관 소장

통진도호부 옛 관아도(중앙도서관 소장)에는 관의 수장이 거처하던 살림집인 내아, 재판과 공식적인 행정업무 처리 공간인 동헌, 이방에 속한 아전들의 근무 관청인 이청(吏廳), 지방의 수령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인 향청, 임금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로 임금 행차 시 숙소로 사용됐던 객사,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던 곡물창고인 사창, 교육기관인 향교, 감옥인 형옥,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여단과 사직단이 등이 부속 건물이 존재한다.

통진이청(通津吏廳) / 월곶면 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통진향교 / 풍화루

김포 관아는 1626년(인조 4년) 김포 현(縣)이 김포 군(郡)으로 승격되면서 두 번 정도 이전을 거쳐 지금의 북변동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여러 부속 관청도 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포 관아는 1867년 한필교 군수가 부임 시절 관아의 모습을 그린 ‘숙천제아도’의 제12도 ‘김포군전도’ 속에서만 볼 수 있다.

김포시와 김포문화원은 김포 역사의 현장인 통진관아ㆍ김포관아를 시민의 곁으로 돌리기 위해 노력 중이다.

‘숙천제아도’ 제12도 ‘김포군전도’ / 김포 군수 출신 한필규(1807~1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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