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석붕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회원

최근 사회에 자그마한 파문을 일으킨 책,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에 나오는 구절로 이 책에 나오는 20여 개 남짓한 소제목 중 「분리수거」란 제목의 글 속에 있는 문장이다. 이 글의 주인공은 착화탄으로 이생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녀는 죽음의 사신이 다른 곳으로 새지 않도록 청록색의 천면테이프로 모든 틈새를 꼼꼼하게 막고 불을 피웠다. 현장은 보통의 자살 현장과는 다르게 정갈했는데 죽기 전에 모든 쓰레기를 분리수거함에 넣어둔 탓이다. 착화탄 봉지, 약봉지, 앨범과 액자에서 빼냈을 것 같은 사진들은 종량제 봉투에 넣어 묶어두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죽은 후의 흔적을 제외하고 재사용할 수 없는 생전의 흔적들을 말끔하게 분리수거해 두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착한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글쓴이 김완은 “그 착한 여인이 스스로에게는 착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인 사람이 되어 생을 마쳤다.”고 썼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녀를 죽인 범인은 그녀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고독사와 대부분의 자살이 그렇듯 죽음으로 인도하는 손길은 스스로의 손이 아니다. 그 손은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어둡고 소외된 단면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문장을 읽어보면, 그녀의 고단했을 삶의 여정이 시리게 다가온다. 그녀의 선한 마음은 아마도 내밀한 폭력적 상황에 저항하지 못했으리라.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지 못했을 것이며, 불합리한 사회 앞에서 조그만큼도 뻔뻔해질 수 없었으리라. 사회의 최약체인 그녀는 모든 불평등과 부조리와 불합리 앞에 사정없이 흔들리고 말았으리라. 그녀는 그 아픔을 전부 자신 속에 묻었을 것이고 그 포만된 아픔이 이끄는 대로 훌쩍 날아올랐을 것이다. 그게 뻔뻔하지 못한 사람들이 쉽게 도달하고야 마는 결론이다. 밖으로부터 받은 아픔을 잊는 방법으로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나는 슬픔과 연민이 선한 인간성의 원초적인 발로라 믿는다. 타인의 사정에 슬픔을 느낀다는 것, 형편에 연민을 느낀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웃에 손을 내밀 수 있는 가장 작은 감정이 아니겠는가. 마음의 벽을 넘어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는 원초가 될 것이다. 이 문장이 가슴을 친 것은 삶의 지침이 되거나 보통의 가치관을 대변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시 볼 수 없을 만큼 슬픈 문장이기 때문이다. 얼마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그 평생에 기록된 슬픈 서사가 읽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이웃을 슬픔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혹시 이것이 그들 중 몹시 친절한 누군가를 그러면서도 자신에게는 친절하지 못한 누군가를 이 세상에 잡아두는 일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들이 쉽게 도달하곤 하는 결론에서 그들 스스로 헤쳐 나오게 될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구성 : )사)한국문인협회 김포지부 고문 이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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