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형

안동대학교

(철학)명예교수

1960년대 내 어린 시절 이야기다. 나는 시골에서 초중학교를,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1970년대 초반까지 다녔다. 돌이켜보면 다른 것은 고사하고 먹고사는 일이 버거웠던 시기였다. 국민의 90% 이상의 직업이 농업이었지만 6월 보리 타작 때까지 양식이 이어지지 않았다. 소위 보릿고개가 빈민의 삶을 위협했다. 그래서 60대 중반 이상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 시절을 혐오하면서, 오늘날 젊은이들의 행태가 안일하다고 나무란다. 동시에 산업화를 찬양하면서 민주화 운동권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질타하는 행태를 보인다.

산업화는 우리 시대를 상업적으로 풍요롭게 만든 건 사실이지만, 이면에 자연을 훼손하여 우리 삶을 피폐하게 만든 구석도 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이 이를 증언한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 동시대 사람들과 생각을 쉽사리 공유하지 못한다. 특히 개구쟁이로 보냈던 여름방학의 향수가 몸서리치도록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고기잡이 추억이다. 그때는 봄, 여름, 가을 어느 때고 마을 앞 도랑에서부터 논, 개울, 강, 못 어디서든 고기를 볼 수 있었다. 모내기 2, 3개월 후에는 우렁이가 논에 가득했고 도랑 풀숲에는 붕어, 피리, 버들피리, 미꾸라지, 메기, 뱀장어, 가물치가 숨어 있어서 손을 넣어 잡곤 했다. 홍수로 흙탕물이 범람하면 큰 강에서 올라 온 잉어나 자라도 마을 앞에서 잡을 수 있었다. 장마가 그치면 물이 갑자기 빠지는 바람에 미처 물길을 못 따라간 커다란 고기들을 도랑 바닥에서 쉽게 주워 담았었다. 기름진 우각호 샛강은 고기 천지여서 어설픈 수제 철사 바늘로도 재미나는 낚시질을 할 수 있었다. 긴 수로 터널에 물이 빠지면 아이들은 횡대로 진흙 바닥을 헤치며 커다란 자라를 잡는 신나는 체험도 나누었다. 그런데 요즘은 시골 봇도랑을 들러보아도 물고기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산중에서도 가재를 구경할 수가 없다. 그 많던 가재, 방개, 미꾸라지, 메기와 가물치들은 어디로 다 갔을까.

벌거숭이 어린이들의 방학은 물속에서만 진행되지 않았다. 풀숲에서는 수많은 곤충이 우리를 반겼다. 8월 초가 되면 방아깨비가 정장을 갖추고, 여치의 뒷다리와 야문 입이 우리 손에 피멍 자국을 남긴다. 아카시아 새 가지에는 여치가 요란스레 울고, 오리나무 둥치에서는 매미가 곡을 해댄다. 밤나무, 참나무의 썩은 몸통에서는 무시무시한 사슴벌레와 우스꽝스러운 풍뎅이가 슬슬 기어나온다. 뽕나무에서 새까만 오디를 따 먹다 잡는 긴 더듬이의 가진 장수하늘소는 최고의 곤충채집 숙제 대상이다. 엄지손가락의 2~3배나 되는 굵기의 콩 메뚜기는 최고의 영양보충제여서 밭을 넘고 강바닥을 가로질러 경쟁적으로 사냥했다. 귀족같이 알록달록한 비단벌레를 좇아 친구들이 연합전선을 펴기도 했다. 볏짚에 침을 묻혀 잡아 올린 떡개구리 다리 구이는 당시 시골의 일상적인 간식이었다.

소먹이기와 꼴베기는 시골 어린이들의 단골 과업이었다. 나는 형제들에 비해 소먹이기를 좋아했다. 소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고, 좋은 풀밭에서 풀을 뜯는 소 모습을 보면 황홀하기조차 했다. 이렇게 하다가 심심산곡을 헤매면서 길을 잃은 적도 있다. 홀쭉했던 배를 터질 듯이 만들어 귀가했을 때, ‘역시 소는 네가 먹여야 해!’하는 부모의 칭찬은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소먹이와 더불어 짊어진 과업은 동시에 한 망태의 꼴을 베어 오는 것이었다. 소가 풀을 뜯는 동안 아이들은 부지런히 꼴을 베어야 저녁 식탁을 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녁 식사 시간은 자아비판의 순간으로 바뀐다. 꼴은 영양분이 있는 깨끗한 풀이어야 한다. 소가 먹지 않거나 싫어하는 풀은 꼴이 아니다. 이러다 보니 꼴 한 망태를 마련하는 일은 쉽지 않았으므로 급기야 도박도 동원이 되곤 했다. 반나절이 지나면 아이들은 벤 꼴을 모아놓고 ‘따먹기’를 한다. 낫을 모두 모아 꽂는 동작을 정해 꽂고, 가장 잘하는 사람이 꼴을 다 가져가는 게임을 하는 것이다. 잘만 하면 그때부터 가재나 잡고 노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골살이를 통해 우리 벌거숭이들은 신나는 방학을 보내면서 자연스레 우리 주변 세계의 생물학적 체계와 지식을 익히면서 환경과 친화를 이루어갔다. 이런 것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너무도 다른 삶을 살았었다. 지금보다 더 빈한했던 생필품으로 살았었지만, 마음만은 자연의 풍요로움을 만끽한 낭만적인 행운아였다. 나 때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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