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 25-예배당 건축 이야기④

박영준

김포중앙교회

원로목사

예배당 지하 터파기 공사를 하고 바닥에는 1m 이상 되는 굵은 돌을 깔고 그 위에 철근 콘크리트로 기초를 하고 그 위에 지하 1층을, 그 위에 지상 1층, 그리고 2층에 본당이 올라가고 그 위에 준 3층이 올라간다. 처음 계획에는 4층으로 하여 1, 2층은 교육관으로 3층을 예배실로 하고 준 4층으로 계획을 세웠었으나 건축비도 문제지만 우리 교회는 부지가 좁으므로 위로보다 옆으로 더 확장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한 층을 줄였다. 지하에서부터 철근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지붕면은 1.2m정도 넓이의 철근 콘크리트 고야스라브 보 6개가 약 25m 넓이를 기둥 없이 건너간다. 내 생각에는 아무리 보아도 위험해 보였다. 기초공사가 저 엄청난 무게의 시설물을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을까? 하는 염려와 이 넓은 공간을 기둥 없이 어떻게 지탱할 것인가? 하는 염려였다. 설계사가 구조계산을 다 해서 설계를 하고 공사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면에 무지한 나로서는 염려가 안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건은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져 내부에 있던 백화점 종업원과 고객 등 1445명이 죽거나 다치는 대형 참사였다. 이 사고로 사망자만 502명에 달했으며 부상자 937명, 실종자 6명이 발생했다. 국내에서 단일 사건 최대 인명 피해로 기록됐으며 재산 피해액은 2,700여 억 원으로 추정된다. 조사 결과, 설계 시공부터 부실 공사로 지어졌고 유지 관리 과정에서도 무리한 증축과 확장 공사를 거듭하는 등 총체적인 부실이 드러났다.

나는 그 사건 후 기도하며 수시로 현장에 나가서 현장 감독과 감리사에게 그리고 시공자에게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도록 시공해 달라고 당부하며 주지시켰으며 그로 인하여 시공자들은 공사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건물은 더욱더 든든히 세워졌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1995년 12월에 입당을 했으나 많은 부채가 있어 감당하기 힘겨워 하던 1997년.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IMF(1997년 12월 대한민국이 국가부도 위기에 처해 국제 통화기금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국가 부도 사태를 면한 사건)가 닥쳐 부채 이자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던 어느 날, 어린 시절에 주일학교에 함께 다니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교회당 건축하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으냐? 소식을 잘 듣고 있다. 내가 크게 도와줄 형편이 못 되어 미안하다. 오늘 사람을 보낼 테니 만나주면 좋겠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날 오후 친구의 사촌동생이 1톤 트럭을 몰고 와 내 방에 들어와서 봉투 하나를 내민다. 뜯어보니 ‘현금으로는 도울 형편이 못 되어 회사에서 만든 어린이용 도서를 기증하니 팔아서 건축비로 쓰라’고 하는 것이다. 너무나 고마웠고 다른 누구의 헌금보다 특별한 의미가 있게 생각되었다. 그 후 그 책들을 팔아 건축 부채를 상환하는 일에 보탬이 되었으니 그 친구의 사랑과 우정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사실 그 친구는 어린 시절 이웃에서 함께 자라며 주일학교를 함께 다녔으나 친구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와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결혼하여 아내가 이단 종교에 빠져 가정이 힘들 때 나를 만나서 “차라리 기독교 교회에 나간다면 나도 함께 교회에 나가겠는데 이건 아니다.”라고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었다.

그 친구는 출판업을 하며 모교인 통진중·고등학교 총동문회장을 지내면서 많은 수고를 했고 장학회를 만들어 고향에서 자라나는 후배들을 도우면서 나름대로 모교와 고향을 위해 봉사를 많이 했다. 내가 은퇴 후에 고향에 내려와 보니 그 장학회는 후배들을 통해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었고 나는 늦게나마 친구를 생각하며 회원이 되어 작게나마 돕고 있다.

예배당 건축 이전에는 목사관은 예배당 건물 옆에 25평정도 되는 교육관 2층에 20평정도 되는 건물을 사택으로 사용했는데 신축하기 위하여 건물을 철거하면서 시청 옆, 전에 교회부지로 사놓고 기도 하다가 매각한(북변동 258-1번지) 곳에 연립주택을 건축했기에 전세를 주고 그 곳 한 세대를 전세로 사용했다. 28평형 연립주택인데 방이 둘이고 거실 겸 방처럼 되어 있는 공간이 있어 아들은 그곳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 건축된 연립주택이라 깨끗했고 바로 앞이 산이어서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면 창 밖에 아름다운 풍경을 사철 볼 수 있었다.

새봄이 되면 연두색 동산이 매일 아름다운 꽃동산으로 변하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색으로 무성한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마치 그 울창한 나무들이 온 몸을 흔들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으로 보였으며 그 속에서는 각종 아름다운 새들이 모여 살았다. 가을이면 아름다운 단풍이 물드는 모습, 겨울이면 잎은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들만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것 같지만 때로는 흰 눈꽃이 피어 장식되어 있는 모습이야말로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그 오묘한 솜씨를 우리는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다.

그 후에 그곳에 여성회관이 들어서서 그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감정동에 있는 34평짜리 효성아파트로 전세로 얻어 이사했다. 먼저 집에서는 두 아이들과 4식구가 살기에는 좀 불편했는데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게 되니 생활하는 공간에 여유가 있어 편리했다. 무엇보다 두 남매에게 방을 하나씩 사용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서 감사했다.

“주님! 자녀들을 주님께 올려드립니다. 하늘의 복으로 채워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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