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손님

엄재국

 

초가 한 채 무너졌다
벽도 기둥도 지붕도
땅 위에 조용히 무릎을 접었다
먼 길 다녀와 부모님께 절하는 자식처럼
오랫동안 엎드려 있다
썩은 짚에 바람이 들먹거려
우는 것도 같고
그을린 부엌 흙냄새에
매캐한 마음을 추스르는 듯도 했다
창문 하나 없이 나무문에 문풍지
문고리에 피어나던
사철 마른 봉숭아 코스모스 같이 지고 있었다
홀연히 일어섰던
제자리의 흙과 제자리의 나무, 제자리의 짚
거두고 챙길, 어디 골라낼 게 하나 없다
일없이 온 손님처럼
그냥, 삭는 중이다
잘, 다녀가는 중이다


시 감상

인생은 잠시 소풍 길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삶과 풍경과 사람들 모두 잘, 다녀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되면, 마땅한 시간이 되면 갈 것은 가고 남을 것은 남는 것이 세상 이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에게 영원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린, 늘 영원할 것처럼 이해득실에 연연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숨을 고르자, 멈춰보자.  우린, 그냥 삭는 중이다. 잘, 다녀가는 중이다. 우린 모두 조용한 손님일 뿐이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프로필 ]엄재국 : 경북 문경, 2001 현대시학 등단, 시집 <정비공장 장미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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