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 21

박영준 

김포중앙교회 원로목사

전쟁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은 상처와 가난뿐이었다. 한국군뿐만 아니라 유엔군도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이북의 인민군 사상자도 엄청나게 많았으니 6.25전쟁은 삼천리금수강산을 초토화시킨 재앙이었다.

뿐만이 아니라 젊은 상이용사들이 얼마나 많이 발생하였던가. 그 상이용사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입은 상처라는 명분으로 엄청난 권한 행사를 했는데 가끔 목발을 짚거나 한쪽 팔을 잃은 상이용사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불쑥 교실에 들어와 연필이나 노트를 팔아달라고 하면 담임선생님은 거절을 못하고 가정 형편이 웬만한 학생들에게 강매하다시피 해서 팔아 주어야만 했다. 선생님들도 무척 힘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초등학교 2학년, 당시 있었던 잊지 못할 일이 생각난다. 오전 수업시간에 상이용사 아저씨가 교실에 들어와서 연필 몇 다스를 팔고 간 후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수업시간이 되었는데 연필 한 다스를 산 친구의 연필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모든 학생들의 소지품을 샅샅이 뒤지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자리에 앉은 학생들에게 눈을 감으라 하고 “가져간 사람은 속히 내놓으라”고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없어진 연필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더니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나오라고 하시며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교실 뒤편 화단 옆 돌계단에 앉으시더니 나를 앞에 세워놓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뺨을 사정없이 때리셨다. 8살배기 뺨이 얼마나 강했겠나... 그때 그렇게 아프게 맞아보기는 생전 처음이었고 아직도 없었다. 그러더니 “빨리 바른대로 말해. 너 점심시간에 점심 먹으러 집에 갈 때 가지고 가서 두고 왔지? 빨리 가서 가져와”라고 하셨다. 그러나 거짓말로 그렇다고 말할 순 없지 않은가.

아니라고 했지만 그래도 다시 사정없이 양쪽 뺨을 때리는 매를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부인하니 결국은 들어가라고 하셨다. 얼굴이 벌겋게 퉁퉁 부었지만 울지도 않고 들어가 내 자리에 앉았다. 친구들의 눈총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다. 사실 우리 반에서 점심시간에 집으로 식사 하러 가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몇 사람이 있었지만 누구보다도 우리 집이 가장 가난했기 때문에 혹시나 하고 나를 의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결국 가난하기 때문에 사람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경우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 반에서 우등생이었고 누구에게도 착한 아이라고 인정받았는데도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나를 의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청소 시간에 청소하던 학생들이 교실 마루창 밑에 들어가 뒤져보았더니 거기에 연필 한 다스가 풀어져 떨어져 있었다. 교실 마룻바닥에 소나무 광솔이 빠져 생긴 구멍으로 연필을 집어넣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구멍 위 책상 자리는 우리 반에서 도벽이 있기로 소문난 학생이었다. 결국 범인을 찾게 되었고 나는 도둑의 누명을 벗게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50여 년이 지난 후 내가 김포중앙교회에서 목회할 당시 선생님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하셨다. 학교가 바로 어머니께서 사시던 집 근처에 있었기에 은퇴식장에 참석해 축하 인사를 드렸다. 그 후, 초여름에 큰 수박 한 통과 두둑한 용돈 봉투를 들고 선생님 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 우리 김포중앙상록대학에 초청해 학우들에게 “나의 어린 시절 담임 선생님이시다”고 소개하고 간단한 강의도 하시도록 했다.

한문의 무(武)라는 글자는 뜻이 깊은데 과(戈)와 지(止)의 합자로 과는 옛날 전쟁을 할 때에 쓰던 무기 즉 창의 모양을 상형한 것이며 창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전쟁하는 것을 한문에서는 간과(干戈)를 서로 부딪친다고 하는데 고대 사회의 전쟁 무기로 무력의 무, 무장(武裝)의 무는 원래 창을 들고 싸움을 방지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무는 본시 전쟁의 무기로서의 무기가 아니라 평화의 도구로서의 무(武)라는 것이다.

이 땅에 다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며 꾸준히 힘을 키워 우리나라가 이만큼 성장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으나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기 위해 온 국민이 더욱 힘써야 되겠다. 피로써 피를 씻고 폭력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우리 후대들에게 다시는 가난에 시달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어린 시절에 겪었던 잊지 못할 전쟁과 가난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청소년시절부터 잘사는 마을을 만들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면서 자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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