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김포시지회 이경순 지회장

1031고지 탈환 양구전투에서 승리, 무궁훈장 받아

수류탄에 허벅지 부상 상이7급...호국영웅 1/3만 생존

71년 전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누어야 했던 가슴 아픈 ‘6.25전쟁’을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며 그날의 의미를 되새겨볼까. 그저 교과서에 담긴 역사적 사실만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IT강국, K-Pop 등 대한민국의 국제적인 위상을 떠올리면 71년 전의 처참한 전쟁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이 모든 토대는 아직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진행형의 전쟁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6.25참전유공자들’이 희생으로 나라를 지킨 덕분에 다져졌다. 이경순(90) 경기도김포시지회장을 통해 6.25전쟁의 의미를 짚어본다.

 

Q 6.25전쟁에 어떻게 참전하게 되셨나.

A 당시 열아홉 살이었다. 그때는 고등학교가 없어 중학교 2학년이었다. 대곶면에서 나서 자랐다. 전쟁이 나고 다들 피난을 갔는데 우리는 가지 못했다. 낮에는 산에, 밤에는 집에 숨어 지내다 인천상륙작전 후 가을에 군에 들어갔다. 자원한 것은 아니다. 머리가 짧은 학생들은 주로 맨 앞에 세워 싸우기에 제일 많이 죽는다. 그렇게는 되고 싶지 않아 도망다니다 일반병사로 들어가게 됐다. 대구 교육대로 들어가 일주일 정도 총알 넣고 총 쏘는 간단한 것만 배우고 바로 전쟁터로 갔다.

 

Q 전투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첫 전투는.

A 교육 후 8사단 10연대에 전입돼 양구에서 첫 전투를 했다. 그때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양구전투는 1031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 고지를 차지해야 양구 일대가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데 1031고지 중간에 북한군이 주둔하고 있는 산이 있었다. 일명 김일성고지라고도 하는 문명고지였는제 여기를 먼저 탈환해야 했다. 이 고지 수색중대가 됐다. 엎치락뒤치락 전투가 계속 벌어지다 갑자기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선두에 있던 나를 포함한 9명은 그 명령을 듣지 못해 고립됐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 그때 분대장이 주변이 있는 수류탄을 다 주우라고 했다. 300개 정도 됐다. 방호 안에서 밤새도록 이 수류탄을 부시럭 소리가 나기만 하면 던지라고 해 그렇게 했다. 날이 밝아 보니 북한군이 다 도망가고 없었다. 그렇게 살아남았다. 이 전투로 무궁훈장을 받았다.

 

Q 전우들의 안타까운 죽음도 많았을 것 같다.

A 전투하다 죽은 전우들도 많지만 어이없는 죽음도 많았다. 교육을 제대로 받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오발 사건으로 생을 마감한 전우 등 고지탈환 후 죽은 사람도 많았다. 2인1조로 움직이는 중기관총을 중대장이 놓으라고 한 자리에 놓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부사수가 북한군의 조준에 맞아 사망한 경우도 있었다. 고립된 9명의 생명을 살린 분대장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죽어도 잊히지 않을 정도로 충격이 컸다.

진군을 하다 10분 정도 쉬기도 하는데 힘들어 어디 앉아야겠다 싶어 검은 바위처럼 생긴 곳에 앉았는데 푹 꺼지면서 수없이 구더기가 나오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우리 군인들 시체였다.

 

Q 끼니는 떼우며 전투를 하셨나...

A 고지를 지키면서 밥때가 되면 동네에 있는 군속이 밥을 지게에 지고 어느 지점까지 온다. 그러면 부대원 2명이 철모에 밥을 받아 담으러 내려간다. 그런데 세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가보니 밥통을 안고 죽어 있었다. 북한군 총에 맞은 거다. 눈물이 확 나는데도 피가 흥건한 철모 속 밥을 누군가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피 흥건한 밥을 먹었다. 다른 중대에 있는 대곶 사람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를 통해 북한군이 전대에 쌀이나 보리를 넣어 차고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군 시체를 들춰 전대를 찾아 연명할 수 있었다.

 

Q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데 어떻게 다치셨나.

1031고지 탈환 후 다른 고지탈환에서 또 수색중대가 돼 탐색을 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잠시 휴식하고 있다 북한군 수류탄에 허벅지를 맞았다. 기를 쓰고 의무중대가 있는 본부까지 기어가 헬기로 대구에 이송됐다. 대구에서 수술을 하고 살아날 수 있었다. 아직도 수류탄 파편이 허벅지에 박혀 있다. 상이7급이다.

 

Q 다리를 다치셨으니 제대하셨을 것 같다.

A 아니다. 휴가를 한 번 다녀온 게 다다. 그래도 다리를 절고 있으니 ‘어노대’라는 곳으로 배치됐다. 이곳에서 군대에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확증을 받아야 한다. 그 확증을 받으면 제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제2학도병들이 나를 보고 데려갔다. 다시 871부대 학도병이 됐다. 이후 후방으로 가 지리산, 거제도, 제주도 등 포로수용소에 있었다. 휴전하고 난 뒤 만기 제대했다.

 

Q 집에서 걱정이 많으셨겠다.

A 5형제 중에 둘짼데 나만 전쟁에 참전했다. 형님은 당시 공무원이라 군대에 가지 못했고 동생들은 어려서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독대에 물 떠놓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들이 무사하기를 비셨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장독 하나가 짝 갈라졌는데 그날이 내가 다리를 다친 날과 비슷한 때였다고 하더라.

 

Q 이후 어떻게 사셨나.

제대 후 부산에도 있었다 강화 여자와 결혼을 하고 서울에 가서 살았다. 영등포에서 자동차 매매업을 하며 12개 상사를 모아 종합상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내가 쓰러지면서 고향에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1999년에 김포로 돌아왔다.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전쟁에서 키운 인내심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전쟁 중에 도망가지 않고 버틴 인내심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삶을 살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김포에 온 뒤 김포시무공수훈자회 회장을 10년 동안 지냈고, 젊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농악을 다시 해 태평소를 불며 대곶에서 농악대로 활동하기도 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경순 회장

Q 올해 6.25참전유공자회 김포시지회 지회장에 취임하셨다. 지회장으로서 한 말씀 부탁드린다.

A 코로나19가 아니면 여러 번 만나 친목도 다지고 좋은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집안에만 있으니 다들 답답해한다. 서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우리 같은 참전유공자들을 호국영웅이라 칭하는데 실제적인 대우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이제 참전 유공자 중 대부분 생을 마감하고 1/3 정도 남았다. 이분들 중에 어려운 분들도 많다. 이 호국영웅 덕분에 나라가 산 것인데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처우가 실행됐으면 한다. 참전용사라면 누구나 60만 원 정도의 참전수당과 치료비 전액 지원이 이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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