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욱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김포시 지부장

아람이란 ‘높이다’, ‘높은 지방’이란 뜻으로서 특정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성경에서 전해 내려오는 아람의 자손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자도 가끔 무대에 섰던 고양시의 아람누리 극장은 그 명칭에 있어서 이러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지며 이번 김포문화재단의 ‘예술 아람’ 공모 사업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김포문화재단이 김포예술활동 지원 사업을 ‘예술아람’이라 칭하고 우리지역 예술을 대표하는 주제로 설정하였는데 과연 이것이 적당한가라는 의문을 먼저 제시하고 싶다.

김포지역은 5,000년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한 무형유산과 지리적 형상으로 인해 오랜 역사에서 공격과 방어 거점으로 사용되며 만들어진 많은 유형유산들이 존재하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을 끼고 굽이돌아 발달된 천혜의 자연환경과 강과 바다를 잇는 해상 요충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명이 현대화 되고 도시가 발달 되며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했다 한들 오랜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그 숨결을 거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재단 담당자가 조금 더 심사숙고해서 주제를 정했더라면 고양시를 모방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 것이며 또한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필자가 격은 예술 아람 공모사업에 관해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 ‘예술아람’은 어떤 공모사업에서도 볼 수 없었던 공모 절차와 심사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공익에 대한 실현 가능 단체와 가치재로서의 예술작품을 가려내는 것은 문화예술적 특성을 지닌 문화재단의 본질적 속성이고 근본적 의무이다. 필자가 경험한 이번 공모심사는 모든 지원자들을 줄 세워 일일이 대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마치 신입사원 면접 보는 대기업 같아 보였다. 전문예술가와 동호회를 서류상 분리해 놓았지만 면접심사라는 명목으로 같은 장소, 비슷한 시간 속에 오랫동안 대기하게 하였고 따로 준비된 대민서비스는 없었으며 커피숍을 이용하여 차나 마실 것 등을 사먹어야 했다. 많은 대기자들이 넓게 퍼져서 각자 앉아 있었고 평상시 서로 아는 사이여도 인사만 할 뿐 어색한 침묵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어색한 순간이야 말로 코로나로 많이 무뎌진 일상 속에 그나마 남은 예술가의 자존심 마져 무너져 내리게 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회상해 본다.

한 시간 남짓을 기다려 들어간 면접 장소에서 돌아온 질문은 심사위원들이 공모 지원서를 제대로 읽지 않고 던진 질문들이었다.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하등의 가치도 없다 느꼈지만 성실히 답변하려 노력했다. 그러면서 필자는 되려 질문을 던졌다. “단체는 개인이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단체의 특성을 고려하여 가산점을 주거나 따로 분리해서 심사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서로 눈치만 보던 그들의 답변은 재단의 방침이기에 본인들은 심사만 한다고 했다.

모욕감, 분노, 억울함이 교차하는 암담한 순간이었지만 조금은 예상했던 상황이었기에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고 상실과 체념의 심정 그리고 안타까움을 가득 안은 채 마무리하고 나왔다. 그 모든 상황이 예술가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 그리고 예술의 본질과 가치마저 상실한 무개념의 현실 그야말로 혼돈이라는 표현으로 밖에 설명되어지지 않았지만 설마라는 믿음이 더 컸었기에 지금의 안타까움이 더 큰 것이리라...

둘째는 단체보다 개인 비율이 많은 공모 결과이다. 공공재는 개인 사유물처럼 사용 되어져서는 안 되기에 단체 지향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단체는 공동의 목표와 공익의 목적을 위해 소속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운영규정을 만들고 준수하며 매년 총회와 분기별 이사회 등을 통해 피드백 한다. 그렇기에 단체는 하나같이 공공성을 띠고 있으며 개별 행동이나 개인취향이 최소한으로 배제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문화재단 등 공공기관들의 속성과도 부합하는 것으로써 좀 더 작은 단위로 이해하며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틀에서 먼저 우선시 되어야 할 점은 공공성이고 그것은 개인과 국가 중 어느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도 같은 맥락이며 사회 속에 개인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개인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것은 인권에 관한 문제이지 공공과 공익에 관한 문제와는 별개다. 단체 앞에 사업자 본인의 이름이 붙은 것을 진정한 단체로 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단체의 이름이 고유명사로서 공공성을 띠는지 혹은 사유성을 띠는지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구분할 줄 알 것이다. 이러한 작금의 사건들은 문화민주주의를 표방하기 이전에나 가능했던 일들이며 그러한 일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이다.

셋째, 필자는 ‘예술아람’ 공모사업의 요강 중 지원내용 목록에 적혀 있는 ‘전문예술인(개인) 또는 단체의 공연 사업 지원’이라는 내용과 장르별 지원 목록 중 무용장르에 ‘비보이댄스’가 들어있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다시 지원내용에서는 (연예제외)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단체와 개인의 차이는 앞서 설명 드린 것으로 갈음하고자 하며 비보이 댄스에 대하여 설명해 보자.

비보이는 비보잉 혹은 브레이킹을 전문적으로 추는 남자를 이르는 말로서 브레이킹은 2024년 파리 올림픽에 정식 종목 채택되어 지는 스포츠 종목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비보이댄스를 순수무용예술에 편입 시켰다면 그 무지야 말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김포문화재단 예술작품 공모사업에서 비보이댄스를 무용예술로서 선정한 것은 중차대한 실수이며 이것은 전문성이 결여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다. 예술의 메카인 문화재단에서 무용예술장르로 비보이댄스를 선정 지원하는 웃지 못 할 헤프닝이 펼쳐진 것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김포의 예술인들에게 돌아갔으며 그토록 순수하고 섬세한 이들에게 치유하지 못할 크나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이렇듯 전문성과 경험의 결여는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게 해주며 항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지역사회에 있어서 예술단체의 사회적 공헌도는 그 예술성을 떠나 무시 받아선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예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밟히고 밟혀 죽을 듯 죽을 듯 되살아나 어느 순간 풀내음 가득 풍기는 잡초처럼 재탄생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김포지역예술단체들은 그렇게 김포와 함께하여 왔으며 무엇보다 강한 애착심으로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전 세계의 문화예술 전문 지식인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공헌도를 바탕으로 한 공공성을 띤 예술단체와 작품을 가장 큰 지원 대상으로 보고 있으며 아울러 독창적인 예술성 또한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평가지표 요소로 적용하고 있다. 원칙과 소신뿐만 아니라 전문성 또한 결여된 이번 공모결과를 보고 어느 누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결과라고 말 할 수 있을까.

형평성을 떠나 불공정, 비합리적이며 근본적 본질마저 상실한 이번 예술아람 공모사업이 김포 문화예술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느껴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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