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고전인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집대성하여 조선의 건국이념이 된 <주자학(朱子學)>을 완성하고, 제자인 유자징과 함께 ‘소학’을 지어 살아가는 법도와 학문의 기본을 제공한 중국 송나라 시대의 대학자 [주희]는 소학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아는 것이 선행될 것이지만, 중요한 것으로 따지자면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올바른 것은 하늘의 이치와 같은 것이며 개인의 이익은 사사로운 인간의 욕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던 주희의 성리학적 세계관은, 결국 그를 동양 사상의 최고 반석에 올려놓았지요.
산이 그곳에 있어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는 산을 찾아가는 당신이 중요한 것처럼, 도서(圖書) 중 특히 ‘고전(古典)의 향기’는 방문하여 얻어낸 지혜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양태와 행동 감각에 필요한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말더듬이 이야기 수집꾼 한비(韓非)는 하루하루 부지런한 정성으로 고대와 동시대의 이야기들을 모아서 <한비자(韓非子)>라는 명저를 탄생하였고, 현명한 진왕(秦王)이었던 정(政)은 그를 받아들여 법세술(法勢術)의 통치 철학으로 중국 최초의 황제(始皇帝)가 됩니다.
말하자면 이론(지식)을 극대화하고 체계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후, 행동(실천)이라는 생동하는 존재 양식을 통해서 목적한 바를 이룬 것이지요. 소인배(小人輩)는 있어도 대인배(大人輩)라는 말은 없다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인은 협량(狹量:도리가 좁음)하여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대인(大人)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대인(大人)은 한비자처럼 말더듬이여도 빛이 납니다.
대저, 역사를 움직인 대인들의 공통점은 사람을 알아본 것에 있습니다. 비록 두 사람 모두 피의 살육자라는 오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인들의 마음속 인물인 마오쩌둥과 시황제는 사람을 알아본 대인이었습니다. 진왕 정에게는 이사와 한비자가 있었으며 마오에게는 불멸의 이인자인 주은래가 있었지요. 마찬가지로 유방에게는 소하와 장량이, 유비에게는 서서와 제갈량, 세조에게는 한명회, 닉슨에게는 키신저가, 삼국을 통일한 조조에게는 순욱과 순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 곁에도 물론 책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난 시대와 숨결이 다른 건, 지도자나 참모 모두 대인적인 기질 대신 개인적인 욕망만이 살아 꿈틀거리며 서로의 달콤한 입술을 핥거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며 대의(大義) 대신 권모술수를 자행하고 있다는 점이지요. 여기서 ‘대의(大義)’는 ‘가온누리의 백성’을 말하는 것이므로 불행하게도 이 나라 현대의 지도자들과 참모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수사(修辭:rhetoric)로 보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신뢰를 전제로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무지라는 견해를 주장하며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습니다. 시대와 대륙의 간극(間隙)을 인식하고 동서양의 차이를 넘어 ‘행동하는 지식인의 지혜로운 활동’은 시대의 바로미터였던 것이지요.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지혜로운 조언자가 있었고, 지도자와 조력자(책사)의 윤리의식에 따라 사회의 건강미는 체중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지요. 출처가 불분명한 곳에서 빌려온 유려한 말과 어설픈 지식보다 생각의 여과 과정을 통한 지혜에서 출발한 실천이 담보될 때 내가 사는 사회의 유토피아는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