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앞의 생

                                   서규정

내 혼자 사는 칼잡이로, 너를 다시 벨 수밖에 없다
무야
생채나 깍두기로
또각또각 착착
도마가 한사코 칼을 뱉어내던 소리, 그것이
죽는 날까지 이빨을 갈아야 할 이유겠다만
기우뚱, 광안리 앞바다 수평선은 기울어지더라도
생은, 자세 한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반듯한
도마만 같아라, 제발
도마를 타자
사랑과 그 잘난 명예까지도
또각또각 착착
그런데 나, 아무래도 여기서 너무 나간 것 같다

언제쯤일까, 구름은 깍두기처럼 뜨고 생채 같은 비 내리는 날

시 감상
도마 앞에서 많은 것들이 썰려 나간다. 무, 배추, 생닭, 도마가 한사코 뱉어내던 소리, 그 소릴 뒤로하고 깍두기며 김치며, 두부며 새로운 것들이 태어난다. 도마는 자르기도 하지만 그 잘려 나간 것들로 인해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삶이 거대한 도마라면 우린 언제까지 자르기만 할 것인가? 도마는 분명 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감칠맛 나는 뭔가를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5월의 도마가 문득, 보글보글 맛을 낼 것 같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프로필 ] 서규정 : 전북 완주,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집 <황야의 정거장>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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