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 목사의 자전적 에세이13

박영준

김포중앙교회 원로목사

중랑제일교회에서 4년 동안 부교역자로 바쁘게 사역하면서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평생 목회를 할 것인데 한 번은 교회를 개척해야 하지 않겠나.’ 개척할 바에는 젊은 시절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4년 차가 되는 1980년 초부터 기도하면서 담임목사님에게 말씀드리고 개척지를 물색했다.

장소는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찾은 곳이 부천시 역곡동이었다. 역곡 전철역이 있고 주변에는 주택이 드문드문 있었으며 택지가 조성돼 있어 개발 여지가 많았다. 그리고 중랑제일교회 성도들 중 몇 가정이 주변에 이사 와 살고 있으며 개척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해서 택지로 조성된 중심가에 건축하는 상가 2층의 40평을 800만 원 전세로 임대했다.

임대비용은 우리 결혼 패물과 두 아이의 돌과 백일축하 선물 중에 패물들을 모두 팔고 부족한 것은 시골 어머니 소유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용했다. 그리고 1980년 8월 말에 중랑제일교회를 사임하고 교회명을 ‘세광교회’라고 정하였으니 그때 모든 일에 협력해 주신 중랑제일교회 담임목사님을 비롯한 모든 성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세 살 된 딸과 백일이 갓 지난 아들을 데리고 1980년 9월 첫 주일. 처가댁 식구들과 누이동생 가정과 중랑제일교회에서 이사 와 살고 있는 젊은 두 가정과 함께 기도하면서 열심히 전도하며 개척의 역사를 이루어갔다.

건물을 계약할 때는 황량하기만 했던 주변에는 연립주택이 들어서고 단독주택들도 들어서 제법 주민이 늘어났고 젊은 세대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런 가운데 이젠 내가 직접 전도하러 다니기보다는 사람들이 찾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생각하던 중 어린이 선교원을 개설해 교회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도사로 개척을 시작해 2년 차를 지나면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목사안수를 받고 개척 3년 차가 되면서 성도가 70여 명이 되어 안수집사 5명과 권사 3명도 세웠다. 그런 과정에 교회는 급성장해 4년 차에 100여 명이 되었다. 40평인 교회당이 비좁아 기도하던 중 우리 가정이 전세로 살던 살림집을 빼서 기존 예배당 옆 신축 건물 2층 80평짜리 건물로 이전했다. 한쪽에 칸을 막아 60평은 예배실로 20평은 살림집으로 했다. 방 6평, 주방 겸 거실 8평, 서재 6평을 내가 직접 공사해 생활하면서 교회는 더욱더 빠르게 성장했다.

그렇게 교회가 성장하며 6년 차에 주일예배에 150여 명의 성도가 모이게 되었을 때 내 속에 또 다른 꿈이 자라게 됐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또한 모든 성도들의 교회인데 어떤 면에서 개척자인 내가 있으므로 오히려 교회 성장의 저해 요인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며 기도하던 중에 지인의 소개로 고양군 일산읍에 소재한 일산신광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그동안 혼신을 다 쏟아온 개척지를 두고 떠난다는 것이 힘든 일이었지만 아내와 함께 기도하고 결정하게 되었다.

성경에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인 하나님은 중요합니다’(고린도전서 3장7절)라는 말씀을 생각하며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맡아서 키워주시지 않겠나? 하는 믿음으로 6년간 나의 온 정성과 물질을 다 바쳐 개척한 세광교회를 후배 목사에게 부탁하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86년 11월. 일산신광교회에 부임해 보니 이 교회에도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있었다. 어딘들 문제없는 곳이 있겠는가마는 목회 경험도 적은 사람이 이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을지 난감했다.

한번은 노회에 속한 어느 교회 행사가 있어 참석했는데 내가 존경하는 나기환 목사님(당시 마포교회 담임)이 예배위원으로 오셨다. 나 목사님은 누님의 스승으로 몇 번 만나 인사를 드린 일이 있고 내게도 사랑으로 대해 주셨기에 행사가 끝난 후 찾아 만나 뵙고 “제가 일산신광교회로 부임해 왔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잠시 머뭇하시다 하시는 말씀이 “힘든 교회이지만 교회를 평안하게만 만들어 봐”라고 한마디 하시고는 더 말씀을 안 하시고 돌아서셨다. 마치 ‘골치 아픈 교회에 왜 갔느냐’는 표정이셨다.

그 후로 나는 나 목사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되새기면서 교회가 평안하게 되는 방향으로 성도들을 섬겼더니 감사하게도 교회는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교회는 회복되었으며 1년이 지나면서 교회가 혼란할 때 떠났던 성도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150여 명이 모이게 되었다. 성도들이 각 부서에서 열심히 봉사하니 당연 교회가 평안해졌다. 그동안 힘겹게 노력한 결과의 보람을 맛볼 수 있었다.

철학자 니체는 “나는 향락(享樂)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일을 원한다”라 말했는데 이 말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간파한 말이다. 인생의 목적은 향락이 아니요 일이다. 일에는 기쁨이 따르고 생산에는 즐거움이 따르고 성취에는 보람이 있다. 철학자 안병욱 교수님은 “네 생명(生命)의 잔(盞)에 포도주를 부어라. 네 생활의 밭에 보람의 나무를 심어라. 네 마음의 밭에 보람의 등불을 켜라”고 했다. 그 후에는 행복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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