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나의 이야기7 – 문미순 어르신

어린 시절

나는 1946년, 해방되던 이듬해 지금은 인천시로 포함되었지만 당시에는 김포군이었던 검단면 불로리에서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형제들은 모두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다. 빠듯했던 살림살이여서 가족 모두의 일손이 필요했다. 6.25전쟁 때는 아버지가 나를 지게에 지고 피난길에 올랐다. 너무 어려서 어디로 피난 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나는 가까운 검단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에 사단이 났다. 나는 중학교 원서까지 써 놓고 상급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큰집 사촌오빠의 도박 빚으로 큰집이 넘어가게 생겼다. 그집을 우리 아버지에게 사라고 해서 돈 없는 우리 집에서는 논 팔고 소도 팔고 해서 그 집을 떠안게 되었다. 그런 사정 다 뿌리치고 중학교에 갈 수도 있었으나 내가 일찍 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진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했던 것이다.

결혼

그렇게 부모님 농사일을 거들다가 1969년 스물네 살 나이에 나보다 네 살 많은 지금의 남편과 중매로 결혼했다. 남편은 3남 1녀 중 둘째였다. 시집간 곳은 김포 읍내 김포초등학교 있는 동네였다. 시부모님이 계셨는데 시댁에서는 3개월 정도 살았다, 그 후 남편의 전근으로 경기도 광주 남정면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은 성실하고 정직한 경찰공무원이었다. 평생을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이다. 그러던 분이 올해 일흔아홉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 너무 일찍 하직하셔서 아쉬움이 크다. 너무 서글픈 일이다.

 

잦은 이사

1975년에 둘째딸을 낳고 76년에 다시 김포로 들어왔다. 경찰 주택을 사서 살았는데 그 집이 벽돌집이라 겨울이면 엄청 추웠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남편 덕분에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 키우고 집안 살림만 잘 꾸려가면 되었다. 남편의 수입이 박봉이긴 했지만 고정적인 수입이 있었고, 농사짓는 시가에서 쌀이며 농작물을 가져다 먹었다. 아쉬웠던 것은 남편이 경찰공무원이었던 관계로 여러 지역으로 이사 다녀야 했다는 점이다. 지금 사는 이곳 양택리까지 하면 13번은 이사한 것 같다. 나로서는 이사 다니는 것이 고역이었다.

 

봉사활동

슬하에 2녀 1남을 두었다. 김포로 다시 돌아와서 아이들은 학교를 다녔다.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큰딸은 간호대를 나와 양호교사로 근무하다가 미술선생을 하는 사위를 만났다. 둘째딸은 인하대 영문과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다. 아들은 전기과를 나와 지금도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딸만 둘 낳았다가 아들을 낳았을 때가 가장 기뻤던 것 같다.

1977년, 막내 낳고 서른이 막 지나 천주교로 귀의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어쩌면 생활의 대부분이 성당 내 봉사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별히 지역 내 문화활동 경험은 없었으나 대신 성당에서 운영하는 여러 문화체험을 해왔다. 노인복지회관 봉사활동이며 도자기체험 등의 문화활동도 성당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픈 몸

2004년 남편이 오랜 경찰 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되었다. 이곳 양택리로 700여 평의 땅을 마련해 들어왔다. 농사 기술도 없이 농사를 짓겠다고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남편은 경험이 없어서 농사일을 잘하지 못했다. 나는 좀 할 줄 알아서 2년 정도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기가 어렵다. 허리 디스크가 와서 수술을 받고 치료 중에 있는데, 거기다 손이 떨리고 자주 넘어지는 파킨슨병까지 왔다. 남편 돌아가시고 내 몸도 좋지 않아 더 허무하고 허허롭다.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날만 기대할 뿐이다.

 

<그림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이야기> 중 발췌 (구술_문미순·옮김_박금숙·그림_김동님, 채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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