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동 이도행소설가
인간은 집이 있어야 살아간다. 우리나라처럼 4계절이 뚜렷한 나라일수록 집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도시민들의 절반이 아직 내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셋방을 전전한다는 사실은 내집 갖기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삶의 터전은 동국 속이었다. 벽을 쌓고 지붕을 올리는 기술과 능력이 없었으므로 자연이 만들어준 굴속에서 생활을 했을 것이다. 동굴 속에서 동물의 뼈나 그릇들이 발견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동물의 뼈는 잡은 동물을 음식으로 먹고 뼈만 버린 것이고 그릇은 그 당시 굴속에서 이용하다가 두고 떠난 것일 것이다. 이후 집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재료는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통나무를 잘라 기둥을 세우고 벽은 흙으로 쌓고 지붕은 풀을 잘라 얹었다. 그러다가 점점 발전하여 초가집이 되었고 더 발전하여 기와집이 되었으며 오늘날은 서구양식이 유입되어 슬라브 양옥집과 아파트가 우후죽순격으로 들어서고 있다. 흙벽돌이 우리 나라에서 처음 등장한 연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흙을 이용하여 벽을 쌓았던 것을 감안한다면 부족사회를 이루면서부터 등장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는 오늘날의 흙벽돌과는 달리 손으로 뭉쳐 쌓았거나 돌과 흙을 겹쳐 쌓았을 것이다. 흙벽돌집은 왜정시대부터 많이 나타났다. 네모 반듯한 벽돌틀을 만들어 진흙과 찰흙을 섞어 물과 버무려 벽돌틀에 박아내는 것이었다. 진흙과 찰흙속에 짚을 잘게 썰은 여물을 넣어 반죽하면 더 단단한 흙벽돌이 되었다. 만들어진 흙벽돌은 햇볕에 잘 말리게 되는데 하루에 두세 차례 물을 주어 단단하게 굳도록 한다. 흙벽돌은 시멘트벽돌보다 단단하지 못하고 크기도 3-4배나 되어 사용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시멘트가 대량 생산되기 전에는 각 농촌에서 이를 이용하여 집을 많이 지었다.

흙벽돌의 두께가 넓으므로 보온이 좋아 담배 건조실을 건립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푸른 담뱃잎을 따다 건조실에 넣고 불을 피워 그 열기로 잎을 말리는데 열을 외부에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해 흙벽돌을 이용한 집을 지었다. 흙은 보온성이 좋으므로 어떠한 재료보다도 훌륭했다.

그러나 흙벽돌은 단점도 많았다. 벽돌 자체가 강하지 못해 벽을 쌓다가 무너지기 쉬우며 한 번 건립된 건물도 30년 이상을 견디기 어려웠다. 흙도 찰흙이어야 되므로 재료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산이나 들에 있기는 하지만 재료 좋은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 곳까지 찾아나서야 했다. 흙벽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시멘트 벽돌이 등장하면서 부터다. 흙을 구워 만든 붉은 벽돌이 등장한 것도 원인이 된다. 흙벽돌의 가장 큰 단점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것인데 시멘트 벽돌은 모래와 시멘트를 배합한 것이어서 웬만한 충격에도 깨어지지 않으며 붉은 벽돌도 불에 구운 것이어서 매우 단단하여 흙벽돌과 견줄 바가 못되었다. 최근 농촌에서 흙벽돌을 이용하여 집을 짓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부분 시멘트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다. 건조실도 마찬가지다. 건축의 눈부신 발전은 우리의 생활구조를 획기적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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