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은 'Magic'이 아니라 끝없는 노력이여"

경쾌한 음악과 함께 미모의 여인이 긴 박스 안으로 들어간다. 마술사는 여인이 들어간 박스가 아무런 눈속임도 없다는 것과 박스를 3단으로 분리할 칼 역시 튼튼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두 칼을 서로 부딪는다. 음악이 바뀌고 마술사는 여인이 들어간 박스의 아래 칸부터 칼을 찔러 넣고 서로 떼어 놓는다. 하지만 박스 안의 여인은 여전히 생글거리며 손에 쥐고 있는 스카프를 흔든다.
80년대 우리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삼단분리마술’. 그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양곡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윤광식 마술사를 만나기 위해 김영랑의 詩 ‘오메, 단풍들것네’의 한 구절 같은 가을날 48번 국도를 달렸다.

꼬마 '어르신'들 앞에서 벌인 잔치 한마당
청바지에 흰색 공단 블라우스를 걸친 그의 모습은 굳이 화려한 마술사 옷을 입지 않았어도 공연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배드민턴장은 공연장으로 변해 예전처럼 갖가지 마술도구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관객을 위한 돗자리 몇 개도 펼쳐 있었다. 그가 마을의 최고 어르신들을 위해 준비한 자리라고 했다. 하지만 조금 후에 객석을 채운 이들은 동네 어르신들이 아니라 40여명의 '꼬마 어르신'들이었다.
마술사는 꼬마 관객들 앞에서 아직 녹슬지 않은 손놀림으로 풍선, 줄, 비둘기, 돈 등을 이용한 갖가지 마술들을 선보였고, 오랜 시간 갈고 닦았을 곡예에 가까운 그만의 기술들을 뽐냈다.
잘 모르겠다는 표정과 흥미진진한 표정이 뒤섞인 채 마술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얼굴 속에서 어쩌면 몇몇쯤은 마술사가 되리라는 장래 희망을 꿈꿀지도 모를 일이었다.

6.25 전쟁고아…먹고 살 길을 마술에서 찾다
"1950년 6.25전쟁이 터졌을 때 내 나이 열 살이었어. 부모님은 장에 나가셨다가 북한군의 포탄에 모두 돌아가셨고, 나는 졸지에 고아가 돼서 의정부에 있는 고모 댁에서 얹혀 살았지. 그러던 중 우연히 의정부에 쇼를 보러 갔다가 마술사가 종이를 돈으로 바꾸는 마술을 보고 '마술을 배우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생각했어. 그 길로 마술사를 찾아가 제자로 삼아달라고 졸랐지. 한 번에 승낙했을 리 있나. 대번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쫒아내더라구. 그냥 물러설 수 없어 다음날 마술사를 찾아가 또 졸랐지. 그랬더니 마술사가 이번에는 부모님 허락을 받고 오라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나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월급도 필요 없으니 밥만 먹여 달라. 그렇게 멋모르고 시작하게 된 마술이 벌써 50년이 넘었네.”
 
손에 쥔 첫 월급 3백만원, 서울 집 한 채 값
"내 스승은 김광선이라는 분이셨는데, 몇 년이 지나도록 마술 기술을 하나도 안 가르쳐 줬어. 공연을 끝낸 스승님과 단원들이 여관으로 돌아가면 나는 극장에 남아 공연준비와 마무리를 해야 했는데, 그때부터 아주 극장에서 자면서 의자를 관객삼아 혼자 연습을 하기 시작했지."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고 했던가. 그러던 어느 날 당시 60대 중반이었던 그의 스승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단장을 찾아가 내가 마술공연을 해 보겠다고 했어. 물론, 스승보다야 기술도 좀 떨어지고 말 주변도 없었지만 그래도 어려서 그런지 관객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
그렇게 공연을 하고 그가 첫 월급으로 받은 돈은 무려 3백만원이나 됐다고 했다. 60년대 당시 중사 월급이 3만원 정도였고, 상도동에 50평대 주택도 2백5십만원이면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정말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전성기 시절, 밤무대 공연만 5군데 누벼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때 선수촌에 들어가 공연을 했어. 처음에는 사물놀이, 코미디, 노래 등과 함께 했는데 외국 선수들이 사물놀이와 코미디를 이해하지 못해서 점점 마술 분량이 늘더라구. 마술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공연모습이 방송을 타고 알려지면서 전성기가 찾아왔지."
유명세를 탄 그의 마술단은 낮에는 행사장으로 밤에는 서울 전역을 누비며 호텔나이트 등에서 공연했다.
"그때는 서로 돈을 싸들고 와서 제발 자기네 무대에 서 달라며 떼를 썼지. 하루 15분 공연에 한 달 1천만원씩 6개월 선불이 아니면 우리 공연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니까."
당시를 회상하는 그의 얼굴은 자긍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술은 Magic이 아녀, 피나는 노력이여!
현재 마술협회에 등록된 정식 마술사는 약 3천명 정도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이름을 알고 있는 마술사들은 손에 꼽을 정도.
“요즘 나이트도 없어지고 스탠드바도 없어지고 해서 별로 설 자리가 없지. 하지만 마술은 노동한 만큼 대가를 받는 정직한 직업이야. 끝없는 노력을 하고 늘 새로운 것을 개발해야 살아남지. 또한 끈임 없이 연습과 연습을 계속해야 진짜 마술이 돼. 마술은 ‘Magic’이 아니고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인 셈이지.”
극장에서 밤을 새워가며 스스로 갈고 닦은 마술 기술로 50년을 살아 온 그는 지금도 새로운 기술들과 마술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가 들려주는 미처 알지 못한 이야기들
"요즘은 비둘기 마술을 잘 볼 수 없지. 옛날에는 꼭 모자나 그릇 속에서 비둘기가 몇 마리씩 나오곤 했는데 말야. 그 이유는 비둘기 수입이 어렵기 때문이야. 조류독감 등으로 인해 통관을 잘 안 시켜 주거든."
마술에 쓰이는 흰색 비둘기의 마리당 가격은 약 60만원 정도라고 한다. 비둘기의 수명은 보통 8년 정도 되는데 지금 윤광식 마술사가 키우고 있는 비둘기는 벌써 6년째라고 하니 조만간 더 이상 그의 비둘기 마술을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아직도 현장을 누비고 있는 현역 마술사 윤광식. 그가 김포에 터 잡은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젊은 시절 알뜰한 아내 덕에 장만해 둔 2만5천 평이 넘는 넓은 땅을 가꾸는 농사꾼으로, 전국을 누비며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마술사로 그는 여전히 전성기를 누비고 있었다.
윤옥여 기자

저작권자 © 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