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다. 아이를 학교에 들여보내며 사야 할 준비물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실내화, 볼펜, 노트, 하다못해 자물쇠까지… 딸아이를 데리고 대형 문구점에 들러 준비물을 사다가 문득, 옛날 학생시절 문구점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한다'고 아침이면 굳이 필요한 준비물이 없어도 쫀득이라도 사기 위해 들르던 '자선문방구'. '아직 계시려나…' 이제는 연세가 꽤 되셨을 아줌마를 만나러 양곡으로 향했다.

지역개발로 잘려나간 문방구... 추억은 새록새록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남궁금순 수필가를 만났다. 양촌지역개발로 옛 길들은 자취를 감추고, 양곡고등학교 앞에는 2차선 도로가 뚫려있었다. 지각하지 않으려고 문방구 앞 작은 골목을 내달려 학교로 뛰어가던 추억을 지금의 학생들은 갖지 못할 터였다. 작은 점포 구석에 쌓여있는 문구들이 아니었다면 '자선문구사'를 찾는 일은 요원했을 것만 같았다. 
"온 김에 우리 집에 올라가. 예전에는 집이 누추해 누가 와도 집에 들어오란 말을 못했는데, 이제는 집도 새로 짓고 해서 다행이야."
 지역개발로 비록 문구사는 반토막이 났어도, 덕분에 새 집을 지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하며 잰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서는 지난 세월 묵묵하게 문구점을 지키며 잰걸음 치듯 살았을 그녀의 70평생이 뚝뚝 묻어나는 듯 했다.

돌이켜보면 하루 같았던 40년 세월
 어느 날, 남자아이 둘이 문방구를 기웃거렸다. 저녁 무렵 학생들이 모두 하교하고 좀 한가한 시간이었다. 한 아이는 망을 보고, 다른 아이가 물건 하나를 훔쳐 부리나케 달아났다. 맨발로 아이들을 쫓았다. 훔쳐간 물건이 어떤 것이건 그녀에게는 너무 소중하고 아까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물건을 훔쳐 달아난 아이는 잡지를 못하고, 망을 보던 아이만 잡았다. 그 아이를 달래 훔쳐간 물건만 가져오면 그냥 넘어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이는 물건을 가져오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던 그녀는 학교를 찾아가 도둑질 한 아이를 찾는 대신 아이에게 작은 선물과 편지를 보냈다. 마침 어린이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이는 반성의 내용을 담뿍 담은 편지를 전해왔다. 한동안은 부끄러움 탓인지 발걸음을 않던 아이가 축구공에 바람을 넣겠다며 오기 시작하더니 그 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선문구자' 단골손님이 되었다.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손님은 없었는지를 묻자, 마치 한 편의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 속에서 비록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만은 않은 그녀만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었다. 그 긴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수필가의 눈 속에는 이내 추억이 그득했다.

열일곱부터 쓰지 시작한 일기, 문학의 길로 이어져
 열일곱부터 지금까지 일기를 쓰고 있다고 했다. 
 "숫기가 없어서 누구에게 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어. 그래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 공책과 연필이 내 친구였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고해성사 하듯 그냥 써내려갔으니까. 문방구를 하면서는 더 답답했지. 자리를 비울수도 없었고,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는 형편에 문방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라디오를 듣는 일이 전부였어." 
 그 시절, 라디오를 듣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는 수필가는 유연히 라디오에 보낸 사연이 채택이 되었다고 했다.
"이것저것 선물 받는 재미도 꽤 있었지. 어려운 형편에 살림 장만도 여럿 했으니까. 그때부터 여기저기에 사연을 보내게 되고, 내 사연이 채택될 때마다 ‘내가 글솜씨가 있구나’ 여겨져 기분이 좋았어.  문학으로 병을 고친다는 얘기가 있는데, 내가 바로 그 경우지."
어려운 형편과 환경 속에서도 남궁금순 수필가는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만학의 꿈을 이뤘고, 지금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간판이 붙어있어야 할 자리에 ‘점포임대’
 "옛날에는 좋았지. 학교 앞에 문방구라고 해봐야 우리가게 하나 밖에 없었으니까. 아침 등굣길에는 아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좁은 문방구로 들어오려고 서로 밀치곤 했어. 문방구로 아이들 다 키웠지…이제는 찾아오는 아이들이 없어."
2010년도에 시작된 ‘학습 준비물 없는 학교’ 시행은 작은 규모의 문방구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양곡에는 대형문구점이 없어 그나마 아직까지 가게 운영을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잘려나간 상가 구석에 아직 남은 문구들을 쌓아놓고 떨이 판매를 하고 있는 '자선문구사'는 정리중이라고 했다. 가게 한켠에는 '점포임대'라는 작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 살아 온 인생을 하나하나 갈무리 지을 시간이라고 생각해. 좋은 작품을 남겼으면 좋겠고, 책도 한 권 냈으면 좋겠어."
 '자선문구사'가 40년의 세월을 뒤로하고 갈무리하듯, 차분하고 조용하게 인생에 대한 갈무리 계획을 밝히는 남궁금순 수필가는 그대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윤옥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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