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광촌미술관 전시 개막 장면

검은 황금을 캐던 탄광이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폐광 절차를 밟던 시기인 1999년 봄비 내리던 어느 날, 30대의 젊은 작가 10여명은 강원도 정선의 한 탄광촌을 향했습니다. 사북을 지나며 회색빛 도시가 눈에 들어오자 한참 떠들어 대던 젊은 작가들의 말소리가 잦아들었고 고한에 다다를 즈음엔 모두들 무거움 마음과 침울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황량하지만 정이 서린 그곳에는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탄광촌 사택 300여동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어디론가 떠나버렸기에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회색빛 슬레이트 지붕과 사택 벽면 곳곳에는 금이 갔고, 지붕도 내려앉았지만 눈길 닿고 발길 가는 곳 마다 남아있는 삶의 흔적이 우리들 가슴을 아리고 시리게 했습니다. 이렇게 쫒겨나듯 다들 어디로 갔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길 모두들 아무 말이 없었죠.
 
그 후, 1년이 지난 2000년 8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삼탄광업소의 사택 300여 채에는 탄광촌 미술관이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거대한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대한민국, 일본, 아르헨티나, 중국 등 4개국 300여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떠나간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공간에서 그 자체를 작품으로 연출한 것입니다. 탄광촌에 미술관이라 하니 다들 의아해 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애초에 갤러리가 아니었던 공간을 작가들이 그 공간에 맞추어 새롭게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하는 공간을 대안공간이라 합니다(최근엔 빈 공장부지나 사무실을 활용한 대안공간 형식의 전시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미술관이 아닌 용도가 불확실한 대안공간에서의 전시 준비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 중 첫 번째는 장소 승인의 문제입니다. 특히 사유지인 경우엔 더더욱 심하다 볼 수 있겠죠. 전시 취지에 대한 이해도가 약하다보니 무조건 거절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탄광촌 미술관의 경우 젊은 작가들이 탄광촌에서 전시를 한다니 소위 말하는 운동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심했던 것입니다. 1년여 기간 동안 작가 섭외와 전시준비는 계속 진행을 했건만 정작 장소 사용허가가 떨어진 것은 거의 전시가 임박했을 무렵이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당시의 무모함이 어처구니없다 여겨집니다. 그만큼 매력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겠죠. 그러나 막상 전시개막을 하고나면 관계자 대부분이 “이런 전시인 줄 알았으면 애 먹이지 말고 진작 허락을 해줄 걸” 이라고 말을 하며 웃습니다. 한마디로 본인들이 생각했던 전시와는 많이 달랐던 거죠. 아마도 전국에서 몰려온 관람객이 지역 경제에도 어느 정도 이바지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기존의 전시장이 아닌 공간을 전시장으로 사용하기 위한 문제는 탄광촌미술관을 진행하던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변화 없이 여전히 부딪치는 문제 입니다. 
 
▲ 삼탄광업소 광부 사택

두 번째는 지역 주민과의 소통 및 공감대 형성입니다. 장소 섭외의 어려움과 같은 맥락에 있는 문제인데, 지역 주민들이 처음에는 풀 한 포기라도 건들면 죽여 버릴 듯이 말을 합니다.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터전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탐탁지 않을 뿐 더러 크고 작은 손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 나온 것이죠. 그러나 작가들의 열정을 보면서 주민들의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갑니다. 전시준비에 방해가 된다며 애써 심은 농작물도 직접 뽑아 치워주고 커피라도 한잔 타서 작가들에게 건넨답니다. 전시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 마을 주민들의 눈물 훔치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더욱 짠하죠. 김포에도 김포미술협회에서 마을의 회관을 중심으로 ‘미술관 만들기’란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위의 경우와 매우 유사합니다. 해마다 마을 이장님을 만나 전시취지에 대한 설명을 하지만 대부분 귀찮다는 듯이 흘려버리고 맙니다. 이장님을 설득했다 싶으면 그다음은 마을 주민들이 반대를 합니다. 심지어는 삽을 들고 쫓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전시 개막을 하고 나면 그동안 닫혀있었던 마음이 활짝 열리면서 작가와 미술작품과 함께 호흡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는 예산입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은 소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없는 돈을 만들어낼 수 는 없는 일이니까요. 탄광촌 미술관의 경우 문화관광부의 보조금과 기업체의 협찬이 일부 있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300여명의 작가가 주머니를 털어 부족한 예산을 채울 수밖에 없었고 그나마 절약하기 위해 남녀 구분 없이 빈 건물 맨바닥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본인의 주머니를 털어서 아무런 이익도 없는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이 대견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님 미친 짓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마도 가슴속의 그 무엇을 창작이란 산물로 보여주고 싶은 작가의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중앙집권적이고 제도화된 미술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공간을 통하여 일반인들과 함께 소통하는 미술의 대중성을 표방하고자 한 탄광촌 미술관은 안타깝게도 전시개막 이듬해 태백으로 향하는 도로공사와 강원랜드 직원들을 위한 아파트로 변하며 탄광촌미술관의 사택과 작품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탄광촌에서의 전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또는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잉여공간을 새로운 예술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한 전시였으며 아마 지금도 많은 젊은 작가들이 대안공간에서의 전시 준비를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
 

최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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