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줌머인연대 자문위원장 차크마 나니 로넬

외국인주민센터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로넬 씨.

"기나긴 세월 핍박 견딘 후 난민 인정받아
줌머인 실상 알리는 데 온몸 바쳐 최선"

방글라데시 동남부 치타공 산악지대에는 약 65만명의 줌머(Jumma)인들이 살고 있다.

방글라데시 전체 인구 1억5천만명 중 0.7%도 채 안되는 소수민족인 줌머인. 최대 종족인 벵갈인들에게 인종과 종교차별, 재산약탈에 맞서 자치독립을 요구하며 투쟁하고 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파키스탄에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줌머인들은 많은 활약을 했다. 방글라데시 독립 후 줌머인들은 정부에 자치권을 요구했지만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벵갈족과 정부는 줌머인들을 상대로 토지약탈, 성폭행, 폭력, 살인 등 인종청소를 위한 학살을 자행했고, 줌머인들은 핍박을 피해 난민이 되어 외국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한국에 온지 20년이 된 차크마 나니 로넬 씨(남, 43). 우여곡절 끝에 정부로부터 난민인정을 받고 한국국적을 취득했다. 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서 이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는 로넬 씨를 만났다.

도와주는 이들이 있어 외롭지 않아요

“너머스카르(안녕하세요).”

동남아시아인 특유의 슬픔에 잠긴 순박한 눈망울을 가진 로넬 씨. 유창한 한국말로 인터뷰를 시작한다. 꽤 어려운 한자말도 막힘 없이 사용한다.

"줌머인이 워낙 소수이고 방글라데시도 그다지 주목받는 나라가 아니다보니 줌머인에 대한 탄압을 알리는 일이 쉽지 않아요."

로넬 씨는 2002년 '재한줌머인연대'를 창설하고 10년 넘게 이끌고 있다. 로넬 씨와 줌머인연대는 한국에 살고 있는 줌머인들을 돕고, 줌머인 문화를 한국에 홍보도 하며 방글라데시에서의 인권 침해를 널리 알리고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줌머인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방글라데시 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하고 국가권력과 인권에 대한 강연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그에게는 '인권운동가'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2004년 난민으로 인정받아 안정인 삶을 살게 된 로넬 씨. 2012년부터 외국인주민지원센터에 근무하면서 이주민 노동자들의 공동체 지원 활동과 이주민 노동자들이 인권을 위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고단한 투쟁의 시절

방글라데시 11개 소수민족 약 65만명의 통칭인 줌머인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에는 자치권을 행사했지만 1947년 인도 해방과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에 이어 1971년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줌머인 자치권은 점차 훼손됐다.

'벵갈족의 나라'라는 뜻을 가진 방글라데시는 1억5천만 인구를 가진 이슬람국가로, 대부분 불교를 믿는 줌머인의 자치권을 보장해주지 않고 있다. 그러다보니 산악지역에까지 밀려드는 산업화와 개발의 파고로 줌머인들의 삶터는 계속 파괴되고 있다.

"개발을 이유로 언어와 문화, 종교, 역사가 다른 소수민족의 삶터를 빼앗는 것은 반인륜적이고 반문명적 행동입니다."

고등학생이던 로넬 씨는 반정부 운동에 참여한다.

“당시 정부에 대항해 게릴라전이 활발히 일어나던 때였어요. 지하단체에 가입해 자치권 획득을 위한 주민 홍보와 게릴라 활동을 했지요.”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사명감으로 게릴라군이 된 로넬 씨는 1986년 정부군에 체포된다.

“체포되고 하루도 빠짐없이 꼭 채운 3년 동안 수감생활을 했지요. 끔찍한 고문도 당하고.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감옥은 내겐 학교였어요. 많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덤덤히 감옥에서의 일을 말하는 로넬 씨. 그러나 깊은 눈망울 안에는 슬픔의 빛이 감돈다.

석방된 로넬 씨. 그러나 그의 앞에는 어려움만 남아 있었다. 출옥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정보기관의 감시는 늘 그를 따라다녔다. 그동안의 투쟁과 저항으로 수만명이 사망했고, 탄압이 격화되고 저항이 격렬해지면서 로넬 씨 등 저항에 앞장섰던 이들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감옥 갔다 왔으니 감시가 심하더라고요. 언제 또 체포될까 두려웠고요.”

스님으로 변장한 로넬 씨는 인도로 피신했다.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1994년 한국에 왔다.

이주민 노동자들의 친구

“1994년이 ‘한국 방문의 해’라고 해서 비자도 없고 한국 오기가 쉬웠어요. 한국엔 불교가 융성하고 인종차별도 없는 나라이고 해서 관심도 있었구요. 일본이나 유럽 등지로 간 동료도 많았지만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이룩한 한국에서 줌머인의 존재를 알리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이런저런 차별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살 수도 있었겠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렇게 사는 것이 싫었어요.”

한국에 들어온 로넬 씨는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가구공장에서 일하며 살았다. 한동안 공장을 전전해야 했던 한국 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그와 같은 처지의 이주민 노동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어려운 처지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천주교와 불교의 인권운동가 분들을 만나게 됐죠. 그분들과 같이 활동하면서 이주민 노동자들의 통역도 해주고 상담도 하면서 점차 사회활동을 하게 됐어요. 제가 좀 언어 습득에 남보다 재주가 있나봐요.”(웃음)

1997년이 되면서 그의 조국인 방글라데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소수민족들의 자치권 투쟁을 앞장서던 게릴라군들과 방글라데시 정부간에 평화협상이 체결된 것이다. 게릴라부대원들은 무기를 반납하고 일반시민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로넬 씨도 기쁜 마음으로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다.

한국으로의 망명, 그리고 난민으로 인정받아

기쁜 마음으로 방글라데시로 돌아갔지만 그는 또다시 실망하고 만다.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철수한다 해놓고 10만명이나 되는 정부군은 그대로 있더라고요. 인도로 집단망명했던 6만여명의 줌머인들이 돌아왔지만 줌머인들은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받지 못했구요. 그래서 평화협상은 다시 깨지고 투쟁이 또 시작됐죠.”

계속된 탄압에 로넬 씨는 2000년 한국으로 다시 떠났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한국 정부에 난민 신청을 하고 줌머인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하나둘 같은 처지의 줌머인들이 늘어났고 줌머인들의 처지를 동정하는 지인들을 만나면서 효과적인 활동을 위해 2002년 '재한줌머인연대'를 설립한다. 줌머연대는 처음 7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20여 가족 70명가량으로 늘었고 이 중 65명이 한국정부로부터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를 포함해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이들이 방글라데시에 있는 가족들을 초청하면서 식구가 늘어난 것이다.

로넬 씨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을 위한 통역이나 강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난민이 대부분인 재한 줌머인들은 공장 등지에서 일하며 생활한다. 줌머인들은 민족을 보전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 결혼도 끼리끼리 하며 매년 4월이면 방글라데시 설인 '보이사비' 행사를 함께 치른다. 로넬 씨의 아내도 줌머인이다.

"2세들은 좀 더 개방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줌머인의 정체성은 계속 지켜나갈 겁니다."

그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에서 살아갈 아들을 위해 2011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아들도 한국인이 됐다.

“한국인에게는 배울 것이 많아요. 한국의 당면과제인 남북문제를 보면 갑자기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노력할 때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점을 배운 것 같아요. 우리 줌머인 문제도 계속 노력하다보면 해결책이 보이겠죠.”

“줌머인으로서 줌머인을 돕는 것보다 한국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으로서 줌머인을 돕는 게 더 쉬워요. 그래서 국적을 취득했어요. 앞으로도 줌머인의 행복을 위해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15살 때부터 줌머인을 위한 인권운동을 시작한 로넬 씨. 이젠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지 않을까. 그의 노력이 하루빨리 결실을 맺기를 기원한다.

 

--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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