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서예에 바친 43년 내공 - 서예가 지당 이화자

"지문이 다 닳도록 손에서 붓을 놓은 적이 없다"

서예란 단순히 먹과 붓으로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닌, 자신을 닦는 수양의 일부분이라 한다. 그래서인가 옛날부터 글씨 쓰는 것을 심화(心畵), 즉 마음을 나타내는 그림이라 했다. 기법의 연습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기법과 병행해서 정신수련을 중요시 한다는 뜻이리라.

컴퓨터와 스마트폰 덕분에 손으로 글씨 쓸 일조차 잊혀져가는 요즈음, 우리 김포에서 전통 서예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당 이화자 선생. 마침 기자가 찾아간 날은 지당 선생의 그동안서예 발전과 후학 양성의 공을 인정해 (사)한국서가협회가 선생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는 연락을 받은 날이었다.

수불석필(手不釋筆)의 정신으로 서예에 매진

캄캄한 밤, 호롱불을 끈 채로 어머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씨를 썼다는 일화. 유명한 서예가 한석봉의 얘기다. 또하나 한석봉에게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석봉이 정자 높이 달린  현판에 글을 쓰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글을 쓰고 있는데 그 때 석봉의 기예를 시기한 자가 석봉을 해하려고 사다리를 쓰러뜨렸다고 한다. 사다리가 넘어가 땅에 떨어질 위기에 처한 석봉은 손에 쥔 붓을 현판에 꽂고 붓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는 전설이다.

어렸을 때부터 병약하게 태어난 지당 선생.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몸이 약한 데서 오는 손떨림 증상으로 고생했다. 이때 선생의 아버님이 쥐어준 붓. 그 때 처음 붓을 잡고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붓을 쥐는 오른손의 힘은 지금도 웬만한 남자들과 팔씨름해서는 진 적이 없다 한다. 글을 쓰지 않는 왼손은 아직도 조금씩 떨리는 증상이 있지만. 지당 선생의 말을 들으니 한석봉의 전설이 전설로만 느껴지지 않는다. “언젠가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려 동사무소에 갔을 땐데 지문이 없다는 거에요. 뭐하는 사람이냐는 물음에 막노동한다고 했죠.”(웃음)

서예에 입문한지 올해로 43년. 그 긴 세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글 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수불석필, 즉 손에서 붓을 놓지 않는다는 정신으로 살아왔어요.” 이렇게 서예에 매진하다보니 지당 선생의 머리엔 백설이 내리고 손끝의 지문은 다 닳아 없어졌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서예에 입문

단아한 모습에 불면 날아갈 듯 호리호리한 몸매의 지당 선생. 60이 훌쩍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앳된 소녀같은 인상의 지당 선생은 양촌읍 석모리에서 2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00세를 넘겨 정정하시던 노모는 작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께서 내가 대학시절 데모에 휩쓸릴까봐 내손을 잡고 서예학원에 데리고 갔어요.”

선생이 대학생이던 20대 초반, 당시는 민주화운동의 여파로 한창 데모가 일어났던 시기다. 어렸을 적 지당 선생에게 붓을 처음 쥐어주셨던 지당 선생의 부친 이기만 선생은 지당 선생이 데모대에 휩쓸리는 것을 막기 위해 어릴 때부터 서예에 소질을 보였던 선생에게 정식으로 서예를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이렇게 해서 지당 선생은  여초 김응현 선생 문하에서  서예의 기초이론과 실기를 10여년 공부한 뒤 결혼 후 지방으로의 이주로 송암 허윤희 선생에게 사사하게 된다.

이후 작가의 길을 걷게 된 지당 선생은 (사)한국서가협회 김포시지부장을 맡으며 6번의 개인전과 200여회의 회원전 및 국내외 초청전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국전 초대작가로서 국전을 비롯 각종 공모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을 보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할 때 보람 느껴

“글의 뜻을 모르고 쓰면 글씨가 제대로 안돼요. 글의 내용을 되새기며 그 뜻을 알고 그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잘 쓴 글씨가 되죠.”

예서와 행서체의 작가로 확고한 위상을 구축하고 있는 지당 선생. 선생은 주제를 특별히 정하고 쓰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글을 ‘논어’와 ‘맹자’ 등 고전에서 의미 깊은 구절을 택하여 쓰고 있다. 지당 선생의 좌우명 역시 <논어>의 한 구절을 택했다. ‘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  自省也’ 즉 ‘어진 사람을 보면 같아지기를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자기 몸에 비추어 반성해야 한다’가 그것이다.

“사람들에게 글을 줄 때, 또는 문하생들에게 ‘호’를 지어줄 때 그 사람에게 맞는 글귀를 찾아야 해요. 서예는 그림과 달리 그냥 보면 별 감흥이 없지만 나에게 맞춤한 내용의 글로 작품을 써주면 글을 볼 때마다 새록새록 글씨의 참맛을 알게 되지요.”

선생은 이러한 필요에 의해 한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한학 공부를 시작했다. 한학에서 시작한 공부는 공부를 낳아 전각과 역학에까지 미쳤다. 이렇게 공부에 빠진지도 어언 20년.

선생은 작품을 할 때나 지인들에게 글을 줄 때도 아무렇게나 작업하지 않는다. “목욕재개까지는 아니지만 컨디션도 조절하고 하루 중 좋은 때를 택해요. 주로 새벽 시간이지만. 그리고 주위에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해요. 부정탈까봐. 내가 정성들여 글을 쓰고 그 글을 보는 사람이 행복해 할 때 공들여 글을 쓴 데 대한 보람을 느끼죠.”

좋은 글 위해 등산으로 건강 지켜

서예는 정적 예술이지만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체력 단련을 위해 지당 선생은 산을 즐겨 찾는다. “힘들게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난날 겪었던 불쾌하고 언짢았던 일들이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용서하고 포용하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산을 오를 때도 험한 산을 골라 돌뿌리를 잡고 기어오르듯 오르는 것을 즐긴다. 이러다보면 팔의 힘을 기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된다. 산을 타다 보면 가외의 소득도 얻을 수 있어 기쁘다. “이상하게 산삼 냄새가 맡아져요. 산삼 여러 뿌리를 캤어요. 언젠가 몇 년 전에는 한 곳에서 산삼 36뿌리를 캔 적도 있어요. 말하면 안 되는데. 가평에 있는 연인산이에요. 한 번 가보시게?”

“산삼 캐면 산에서 내려와 식당에서 삼을 갈아서 술에 타서 한 잔씩 하지요. 근데 난 잘 안 먹어요. 다 나눠주지요.” 지당 선생 덕분에 같이 산에 오르는 지인들이 등산모임 이름을 ‘심마니클럽’이라 부른다.

고향과 후학 양성 위해 온힘을 기울인다

지당 선생은 지난 2004년 (사)한국서가협회 김포시지부장을 맡은 이래 사우동 눌재회관 4층에 지당서예실을 갖추고 김포지역의 서예문화를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위해  장맹룡비집자의 ‘사자소학’을 펴내고 김포대학에서의 강의를 하고 있으며, 태어나고 자란 양촌읍의 주민문화센터에서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서예를 보급하고 있다. 또10년 넘게 서울 남부교도소에서 재소자들에게도 서예를 지도하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

특히 김포 현인 중 한 분인 문양공 눌재 양성지선생을 기리는 전국서예대전을 10년 넘게 개최하고 있는 등 서예 보급과 전파에 혼신을 다하고 있다. “내가 지니고 있는 서예에 대한 지식과 기능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일은 내가 끝까지 할 일이에요. 서예 발전과 후학 양성에 모든 열정을 쏟아 후대에 남을 수 있는 서예가가 되고 싶어요.” 지당 선생은 작지만 큰 거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김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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