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1개월, 누구도 승리하지 못한 참상 6.25

지난 5월 머리가 희끗희끗하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한 한 어르신이 신문사를 방문했다. 대곶면에서 나고 자랐고 지금까지도 고향을 지키는 85세의 권영세 어르신(사진). 6.25전쟁에 참전해 13개월간 의무병으로 복무했던 당시를 회고하며 쓴 글을 보여주셨다. "나이가 있어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기억의 편린이라도 지금의 세대에게 전하고 싶다"고 밝힌 권영세 어르신. 60여년 세월 속에 시간의 순서가 섞여 있는 글과 기억을 대화와 구술을 통해 정리한다. <편집주자>

압록강까지 올랐다가 밀리던 그때
22살 청춘들의 참전...대곶서 70명

6.25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지났다. 나의 눈과 몸도 날로 시들어가고 있지만 바로 엊그제 일처럼 모든 일들이 생생이 떠오른다. 전쟁이었지만 20대 초반 청춘들의 참전이었기에 생각하면 다시금 마음이 설레이는 것도 사실이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두살, 내 고향 대곶에서는 70여명이 1차로 참전했다. 우리가 입대할 당시의 전황은 긴박함의 연속이었다.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남한은 북한의 갑작스런 남침에 밀려 그해 8월초에는 낙동강까지 전선이 내려갔다. 당시 지도를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어서 토끼로 말하자면 항문쪽만 조금 남아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미군을 포함한 16개 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가혹한 전투 속에서 적군을 소탕하고 그 많은 소련제 탱크도 다 부수고 전진을 시작했다. 맥아더 사령관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며 합동작전을 펼쳤고, 9월 26일 서울을 회복하고, 10월 20일에는 평양까지 진격했다. 6사단 7연대는 압록강 초산까지 들어가 압록강 물을 떠서 사단장에게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중공(중국)의 모택동에게 지원군을 요청, 그해 11월 엄청난 숫자의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포위 작전을 펴며 내려왔다. 내가 입대한 시기가 그때였다.

"야! 이거 진짜 심한 정치로구나!"
1.4후퇴, 38선을 등지고 남으로

1950년 11월 8일 나는 당시 대구에 있던 제2훈련소로 입소해 15일간 기초 군사훈련을 받은 후 동두천의 부대에 배속됐다. 그 해 연말은 전쟁이 더욱 치열했다.

중공군 18개 사단이 서부전선을 공격해 평양이 다시 공산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중부전선을 맡은 우리는 새까맣게 내려오는 중공군과 인민군에 맞서 교전하다가 포위되었고, 적들의 포위망을 겨우 뚫고 내려와서 38선 부근을 방어 했지만 결국 떠밀려 서울을 뒤로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그 때가 이른바 '1.4후퇴'다.

1.4후퇴 피난행렬은 참혹하기만 했다. 여인네들은 하나같이 보따리를 이고 걷고 남자들은 짐을 걸머지고 길을 나섰다. 6, 7세쯤 된 어린 꼬마들도 보따리를 걸머지고 다박다박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얼마나 애처롭고 가엾어 보이는지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 많은 피난살이는 설움도 많았다. 외양간 하나만 얻어도 일류호텔이고 가마니 한 장만 얻더라도 공단이불이었다.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라!"
다시 북진! 하지만 70만 공산군이

나는 그 피난 난리 중에도 위생병으로 뽑혀 진천을 거쳐 청주에서 한 달간 위생교육을 받았다. 전쟁통에 전투병 만큼이나 위생병의 죽음도 많아 수시로 위생병을 뽑았던 것이다. 교육 후 일등병에서 하사(지금의 상병)가 된 나는 6사단 7연대 의무중대에 배속되어 최전방 전초중대인 7중대로 파견 됐다.

연초부터 유엔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총반격을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해임된 상태였지만 우리는 북으로 계속 진격했다. 그러다 가평의 사창리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의 집중공격을 받고 오히려 포위되고 말았다. 나로서는 동두천 포위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때가 이른바 공산군의 춘계대공세였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공격에 참여한 공산군의 숫자가 70만명으로 대군이었다.

6사단은 양평 용문산까지 내려와 다시 진지를 구축하고 2연대를 앞에 배치하였다. 사단에서는 2연대에게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사수하라. 뒤돌아서는 놈은 쏜다"고 명령했다. 2연대와 우리 모두는 철모에 '결사대'라고 쓴 띠를 둘러매고 방어선을 사수했다. 당시 우리들은 "사수만 하면 전투에서 절대로 지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포복으로 기어 올라오는 중공군 부대들을 소탕했다.

퇴로가 없어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우리들 앞에서 중공군은 지칠 대로 지쳐 결국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중공군이 분산되자 사단은 2연대를 철수시키고 19연대와 7연대가 다시 공산군을 밀어붙이며 전진했다.

그 당시 내가 속으로 되내여 불렀던 노래가 '노량진 전투가'이다. 위생학교 교관이 서너번 불러준 노래다. 그렇게 노래라도 속으로 부르지 않으면 매일매일 전우들의 주검을 돌봐야하는 슬픔을 달랠 수가 없었다. 노랫말은 애잔했다.

"노량진 전투에 쓰러진 전우가 마지막 남긴 말씀 역력히 떠오른다.
우리 부모님 보시거든 잘 싸우고 잘 죽었다. 소대장님 부탁해요, 이 천지 소원일세"
"옆집에 춘자야 몸성히 잘 있느냐. 이 나라 이 땅에서 전투가 왠말이냐.
뒤뜰 안에 살구꽃은 올 봄도 피었느냐. 중공군 물리치고 널 찾아 가겠노라"

"저거 큰 일 났다. 박격포 준비!"
휴전협상, 뺏고 빼앗기는 고지전

1951년 봄과 여름의 전쟁은 격렬하기만 했다. 그러다가 7월부터 휴전협상이 시작됐지만 막상 전장에는 휴전이 없었다. 손바닥 만한 땅이라도 더 빼앗으려는 전투가 다시 또 한 해를 넘겨 계속됐기 때문이다.

1952년 4월 13일 야간이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의 시작이다. 우리 부대는 금와지구 575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서로의 땅을 조금이라도 더 빼앗기 위해 최전방의고지전이 계속됐다. 당시 중공군은 밤에, 아군은 낮에 공격 했다. 중공군은 공격을 시작하기 전 먼저 포를 한바탕 쏘고 포 소리가 끝나면 공격해 왔다.

우리는 적들이 올라오면 조명탄을 쐈고, 조명탄 밝기가 개미까지 보일 정도였다. 그날도 중대장은 적들의 공격낌새를 알아채고는 "저거 큰 일 났다. 박격포 준비!"하고 소리를 쳤다.

100미터 거리를 두고 한 방을 쏘니까 중대장이 "명중이다!"하고 큰소리로 악을 질렀다. 우리는 연신 포탄을 쏘아대며 밤새도록 교전했고, 날이 밝으면 적들도 철수하겠거니 생각했다.

"툭!" 떨어진 뭉치, 몸을 피했지만
속옷입고 전장에서 육군병원으로

하지만 그날따라 중공군은 철수하지 않았다. 아침이었지 만 안개가 자욱했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침이 한참 지나서도 교전이 이어졌고 나는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 진지와 참호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바로 앞에 "툭!" 하고 손바닥만한 물건이 떨어졌다. 나는 무엇인지 확인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참호로 몸을 던졌지만 이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에 깨어 보니 한 전우가 나를 업고 허겁지겁 대대 구호소로 뛰고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수류탄 파편으로 엉망이 되었고, 응급처치 후 야전병원을 거쳐 서울36육군병원으로 후송 됐다. 하지만 어찌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환자복이 계속 축축할 정도였다.

내가 다시 밀양7육군병원으로 후송을 가게 되자 보급계가 와서는 입고 있는 환자복을 벗어놓으라고 했다. 보급계는 벗기려 하고 간호장교는 손대지 말라고 하고 군의관도 "중환자인데 관물 관리에만 애호심이 있지 환자한테는 애호심이 없냐"며 따졌지만 보급계는 군의관이 나간 후 이내 달려들어 옷을 벗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팬티만 입고 밀양으로 후송됐다. 전쟁통이라 그만큼 물자가 귀했고, 환자들의 후송이 많았으니 보급계도 달리 방법이 없었으리라.

이후 나는 밀양7육군병원에 입원하며 5개월 동안 치료를 받았고, 상이용사로 1계급 특진하여 1등중사(지금의 하사)로 명예제대했다. 그 뒤 10여 개월이 지난 1953년 7월 27일 드디어 휴전협정이 체결됐지만, 양쪽 모두 이긴 사람이 없었다.

휴전 1시간을 앞두고 죽은 전우도

나는 동두천과 사창리, 942고지, 575고지에서 포위를 당해 죽을 뻔 했다가 겨우 살아나왔으니 최소한 사사일생(四死一生)이다. 하지만 아군과 적군들, 아까운 청춘들이 너무도 많이들 안타깝게 죽었다.

휴전을 한 시간 앞두고 죽은 국군도 있었다. 또 아무리 적군이었지만 그들의 주검을 볼 때도 안타깝기는 똑같았다. 그저 '아까운 목숨 들, 태어났을 때는 모두 귀한 자손이었을 텐데'하며 한숨 만 쉴 뿐.

다른 전우들에게 미안하다. 나는 전쟁터에서 전우들과 끝까지 함께 싸우지 못했지만 부상당한 상이용사라는 이유로 그나마 예우를 받는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구사일생으로 치열하게 전투를 치른 전우들은 아무런 보상도 없고 지금도 생활이 어렵다. 나라와 지역에서도 참전자들에 대한 예우를 더 생각했으면 좋겠다.

또 길을 지나가는 노인들을 볼 때 그냥 늙은 사람으로 만 치부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전쟁에서도 나라를 지켰고 참상 속에 스러져가는 대한민국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비록 늙었지만 우리가 있었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고, 대한민국이 있음으로써 우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애국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의 희생이다.

<정리=최구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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