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향기] 국내 유일 와편각 작가 여공 스님을 찾아서

그의 작품은 버려진 기와를 수집하는 데서 시작되고 깨지고 상처 입은 기와를 밤새 손질하는 데서 익어간다. 그렇게 나와 하나가 되어 새로워진 와편에 시와 법문과 그림을 새긴다. 생명을 입히듯.

그를 만나러 가는 날은 눈이 쏟아졌다. 눈으로 인해 월곶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군하리에서 접속한 우리는 4륜구동차로 갈아타고서야 그가 사는 아담한 흙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월곶면 용강리 마을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는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와편각( 瓦片刻, 기와) 작가다. 그의 법명은 석여공이다.

여공스님이 기거하고 작업하는 아담한 흙집 문화도량의 이름은 묘적사(妙寂寺)이다. 묘할 묘, 고요할 적. 고요함이 묘한 집이라는 뜻이다.

여공스님을 만나러 가는 날은 하늘의 눈빛과 버려진 와편에 새긴 눈빛이 만난 날이다. 눈부시게 빛나지는 않지만 볼수록 가슴 속에, 그리고 인식 안에 새기고 싶은 그의 작품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와편각은 기와에 글씨나 그림을 새기는 작품 활동이다. 일반 서각이 갖춰진 나무 재료에 하는 작업이라면, 와편각은 기와를 재질로 삼아 서각을 한다. 특히 여공스님은 버려진 기와에 작품을 새긴다. 여공스님이 처음 개척한 분야다. 그래서 국내 유일한 와편각 작가이기도하다.

여공스님의 와편에 대한 작업은 차별화 차원이 아니다. 오래된 전통과의 만남, 살아 숨 쉬는 것, 오랫동안 버려진 곳에서도 숨 쉬고 기다려온 생명 같은 존재가 바로 버려진 기와라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에게 작품 활동은 버려진 기와를 수집하는 것부터다. 산사에 버려진 기와, 깨지고 묻힌 기와를 찾으러 나서는 발길이 시작되면서 그의 작품은 시작된다. 그에게 기와수집은 오랫동안 숨죽여 묻혀 있던 잃어버린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다. 또한 기쁨을 맛보는 과정이다.

그가 수집하는 기와는 민간에서 얻는 기와와 절에서 수집한 절 기와가 대부분이지만 차이가 많다. “같은 기와라도 절에서 수집한 기와는 민간 기와에 비해 단단하다. 아마도 많은 기도소리를 듣고 에너지가 꽉 차서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대웅전 지붕에 얹힌 기와는 기도소리를 들어서인지 단단해 칼질이 어려울 정도지만, 민간 기와는 속살이 다르다고 말한다.

버려진 기와를 만날 때 심정을 물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버려진 것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아주 기쁩니다. 그리고 절간 뒷켠에 묻혀 있는 기와를 수집할 때면, 처음엔 그냥 가져가라고 하다가도 혹시 모를 보물일까 금방 인색해지는 사람도 많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그에게 와야 보물이 되는 원석은 역시 기와지만, 갈고 닦는 수행의 결과처럼 속살에 새기는 그의 작품 손길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그의 작품은 이처럼 버려진 기와를 수집하는 데서 시작되고 깨지고 상처 입은 기와를 밤새 손질하는 데서 익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와 하나가 되어 새로워진 와편에 시와 법문과 그림을 새긴다. 생명을 입히듯.

“처음에는 서각을 배웠습니다. 나무에 서각을 새기다 청자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기기 시작했습니다. 되더군요" 청자기 제작에 몰두하던 도공이 버린 초벌 조각을 우연히 줍게 된 여공스님은 거기에다 새김질을 해보았다.

여공스님은 청자에 새기는 작업을 하던 도중 기와 조각에도 새겨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기와 조각에 칼을 댔는데 칼끝이 깨져버리기는 했지만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와에 글이 새겨졌다. 여공스님은 그 때 이거다 싶은 환희심을 느꼈다. 와편각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나무에 새기던 서각용 전각도(篆刻刀)로는 단단한 기와 작업은 어림도 없었다. 여공스님은 이후 와편각용 칼을 1년을 찾아다니다 진주에서 와편각용 칼을 발견했다. “그 때 깨춤을 추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와편각을 하겠다고 작심했습니다” 칼을 찾은 기쁨은 평생 와편각을 하겠다는 발원으로 이어졌으나, 불교에 출가하면서 그 발원은 멈췄다.

여공스님은 출가 전부터 글과 그림, 서각에 이처럼 능통한 사람이었다. “출가를 결심하면서 글을 쓰지 않고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겠다는 다짐 속에 그것들도 함께 묻은 셈이다.

이후 출가를 하고 5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버려진 기와를 주어다 새벽까지 사포질(손질)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새벽까지 그 작업을 하고 난 그는 과거의 습(習)을 버리지 못한 자신을 보며 많은 자책을 하며 괴로워했다고 회상했다.

 

여공스님은 버려진 기와에 예술을 입힌다. 법문과 글과 그림을 새기는 과정에서 생명과 각심과 문화를 함께 새겨 넣는 게 여공스님의 와편각이다. 중생들의 모습을 상징화하여 그린 ‘만고중생’(우측 上) 과 108명의 승려가 엎드려 참회를 하는 모습을 새긴 '백팔참회승도’(우측下)

서예, 전각, 염색, 옻칠 기법 등으로 버려진 기와에 생명 입혀

부처님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는데 출가 때 결심을 저버린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 한 그는 자신이 지기로 했다. “내가 지기로 했습니다. 내가 (작품 활동) 약속을 어기고 내가 이긴다고 수행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문화포교사로서 전법활동에 전념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더니 비로소 자유로워졌습니다”고 밝혔다. ‘감옥에서 해방’된 여공스님의 작품 활동은 그 때부터 다시 시작됐다. 문화전법도량을 열고 본격적인 문화포교 활동이 시작된 셈이다. 자유롭게.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말이 생각났다.

여공스님은 기와의 성질을 알기 위해서 스스로 도판을 제작하고 거기에 새김질을 했다. 도자기 성질을 알아야 와편각을 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라져 가는 한국의 기와를 보면서 다시 도판을 중지하고 기와 수집에 나섰다. “한국의 기와는 향후 20-30년이면 사라집니다. 그래서 도판을 미루고 와편각을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도판은 언제든지 다시 할 수 있지만 사라져가는 기와는 다시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흙과 도자기 가마만 있으면 얼마든지 도판을 만들 수 있고 거기에 새김질을 할 수 있지만 기와는 사라지면 다시는 얻을 수 없기에 와편각에 몰두하기로 한 것이다.

와편각을 얼마나 했느냐고 물었다. “시간개념이 없어서...십수 년은 됐겠죠. 그렇게 하다 보니 제 작품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 있습니다.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닐까요. 하찮은 것도 그런 감동이 있다면 예술입니다” 그의 예술관은 시대를 뛰어넘어야 진정한 예술이라고 강조한다. 눈앞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역사로 이어지며 평가받는 긴 숨결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새로운 재료를 개척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어떤 평가를 받을지, 완성도를 가지고 후대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다면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며 “기능으로 하는 기법을 뛰어 넘어 마음을 움직일 뭔가가 있다면 예술적 가치가 있습니다. 자기도취가 아닌 자긍심을 가져야 합니다. 알고 보면 재미있습니다. 암튼 그냥보세요”

그는 “문자를 세우지 마라”는 말을 늘상 마음에 새긴다. 문자는 수단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것. 와편각 작업은 전각 기법을 응용해 표현하기 때문에 그림과 글, 서각이 갖춰져야 완성된다. 여공스님은 글과 그림, 서각에 능통하다. 많은 서각가들이 남의 글로 작품을 하지만 여공스님은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서체로 새긴다.

와편각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고 예민한 작업이다. 한 획이라도 실수하면 작품을 버린다. 어렵게 구한 재료(기와) 때문이기도 하다. 와편각에는 서예, 전각, 도예, 염색, 옻칠 기법 등 다양한 기법의 응용이 들어간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배우지 못하는 것도 이런 난이도 때문이다.

최근에는 중단했던 도판을 공부 중이다. 옻칠을 응용해 발전된 와편각을 선보일 생각이다. 와편각 초기 도색 기법을 배우기 위해 가구 공장 도장부에 취직해 3개월 동안 가구칠을 배우기도 했다. 여공스님이 도색과 옻칠 공부를 하는 것은 가장 한국적인 색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선조들이 옻칠을 한 이유를 안 것이다. 조만간 진화된 와편각의 새로운 향기를 맛 볼 수 있을 것 같다.

작업을 하는 자세에 대해 물었다. “필법(筆法)이 도법(刀法)이라고 합니다. 붓은 칼처럼, 칼은 붓처럼 사용하면 됩니다. 그리고 스승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것을 만들 수 없습니다” 와편각을 진화시키기 위한 그만의 수작(手作)이다.

그는 죽음학에 대해서도 공부 중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물었다. “잘 죽어야 잘 태어나고, 그래야 잘 살 수 있고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의 미학이 따로 없다. 지금 여기서 잘 살아야 한다.

그는 와편에 법문만 새기는 게 아니다. 아름다운 시도 새긴다. 시집을 펴낸 시인이지만 자기 시를 새겨보지 못하고 남의 시는 많이 새겼다. 그가 새긴 글들에 대해 듣다 보면 다른 여공스님이 보인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스텅스 블루. <사막> 전문.' 이 글은 인간에 대한 외로움이 묻어서 글을 새겼다. " 내가 종교처럼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킬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분명히. 애국. 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리영희 선생의 글 중에서 이 글을 보다 소름이 돋았다. 그 글을 깊이 와편에 새겼다. 지식인의 표상 리영희 선생의 ‘진실’과 여공스님의 ‘소름’은 맞닿아 이어지고 있었다.

눈꽃이 피면 용강리 문화도량 굴뚝에 연기가 핀다. 장작이 타면 흙냄새 나는 여공스님의 문화도량에도 작품이 피어난다. 중생은 연기를 피우고 승려만 꽃을 피울까? 여공스님의 문화 도량에는 하나로 꽃이 핀다. ‘만고중생’의 아우성이 ‘108참회승도’ 처럼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다. 그의 손길이나, 단단한 와편각이나, 김포 용강리 모두, 거기에 하나로 있다. 예술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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