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갈 때 빼놓곤 김포를 떠나본 적이 없습니다.”
진짜 김포토박이, 그리고 41년간 전자제품 수리상으로 한 우물만을 판 김한수(金漢洙)씨는 1938년 북변동에서 태어나 2002년 12월 현재까지 고집스레 같은 동네서 산다. ‘돈만 벌면 타지로 떠나는’ 다른 토박이들과는 달리, 김씨는 한 자리에서 2남3녀를 낳고 키웠다. 자녀들도 강서구 사는 둘째딸, 인천에서 목회 하는 큰딸을 빼놓곤 모두 김포에 적을 두고 있다.

41년간 한집 한가게 지켜
전화기·TV·인터폰·녹음기 수리전문점- 그가 운영하는 광명당은 ‘김포읍’시절 소망약국 옆자리를 36년간 지키다가 99년 10월, 터미널에서 걸포동 가는 길목인 지금 자리로 이사왔다.
그나마 이 가게도 김포제일교회가 진입로로 사들여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상태. “가게가 헐리면 책상과 부속품만 갖고 집에서 수리를 할까 해요. 근데 손님들이 저희 아파트까지 찾아와 수리를 맡기러 올까 싶어 고민입니다. 가능하면 작은 콘테이너박스라도 하나 마련해서 저를 잊지 않고 오시는 분들이 부담 없이 들렀다 가시도록 하고 싶은데….”
연세도 있으시고 40년 넘게 고장난 기계 고치는 일을 했으니 이제 그만 쉬셔도 되지 않겠느냐 했더니 오랜 세월동안 잊지 않고 찾아주시는 손님(대부분이 노인들이란다)들을 외면할 수 없고 늘그막에 소일거리라도 없으면 안될 것 같아 손을 놓을 수 없단다.
그는 요즘 몸이 좋지 않아 오전에만 가게를 보고 오후엔 매일 물리치료를 받는다. 1년 반 넘게 신경통을 앓고 있는데 원인은 별나게도 ‘지나친 운동’이다. 배구, 축구, 농구, 탁구, 테니스 등 구기종목은 다 좋아해서 배구 특기생으로 경희대에 입학했을 정도. 의사는 운동을 그만둬야 병이 낫는다고 하는데도 그는 중독된 사람처럼 조기테니스회에 가입해 매일 아침 테니스를 친다.
직장도 자주 옮기고 직업도 쉽게 바꾸는 요즘 세태에 비춰, 별로 빛도 나지 않고 벌이가 좋은 것도 아닌 전자제품수리상을 고집스레 지켜온 이유를 물었다. “배운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웃음) 군대 갔다와서 뭐할까 하고 있는데 안경점 하던 매부가 라디오 판매점으로 가게를 바꿨는데, 그때만 해도 라디오 갖고 있는 집이 드물었거든, 장사가 잘되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라디오가게를 차렸지. 수리는 기술자한테 맡겼는데 수리하는 걸 어깨너머로 배우면서 자연스레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사람들이 나한테 수리 잘한다고 하는데 잘하는 게 아니고 ‘고치겠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에요. 손님이 어떤 고장난 물건을 가져왔을 때, 전 ‘꼭 이걸 쓸모 있게 고쳐놓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거든요. 제일 좋았던 시절요? 역시 70년대였죠. 80년대부터 우리 일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는데 그때 다른 업종으로 바꿀 걸 하는 후회를 한 적도 있지만 만일 내가 그만두면 나를 찾아왔던 손님들은 어디로 가나, 하는 생각에 선뜻 그러질 못했습니다.”

41년 단골손님 배척못해 죽는날까지 할터
물리치료 받기 시작한 4개월 전부터 오전에만 가게문을 여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을 때도 많다. 그는 ‘신문 보러 나온다’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보여주었다. 선친은 동아일보의 오랜 구독자였고 본인은 조선일보 팬이란다. 1면 머릿기사부터 마지막 면 광고까지 그는 꼼꼼히, 샅샅이 읽는다. 하다 못해 신문 사이에 끼어오는 수북한 전단지까지 빼놓지 않고 ‘정독’한다. 이유는 ‘재미있어서’다. 운동 뿐 아니라 활자중독 증세도 있는 셈이다. 물리치료 받을 때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어서 요즘은 인물전기를 읽는 중이라고 한다. 얼마 전엔 김포를 방문했던 밥퍼목사 최일도씨의 책 5권을 모두 독파했다.
가장 인상깊게 본 책으로는 본지 편집위원이기도 한 김종일(북한문제연구소 이사)씨의 「공길동」을 들며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현실을 심도 있게 다룬 책인데 당시 시장이었던 유정복씨에게 개인적으로 전했더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는 ‘자랑’도 들려준다. 기자에게도 빌려줄테니 꼭 읽어보라고 신신당부하신다.

고장나면 즉시 새것구입 큰 아쉬움
버려질 물건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다시 멀쩡한 제품으로 둔갑하다보니 자연스레 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아나바다’운동 예찬론자가 됐다. 몇 년 전의 IMF, 그리고 곧 심각하게 닥칠 것이라는 경기침체의 원인을 그는 ‘너무 흥청망청해서 이런 지경까지 왔다’고 분석하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30대 주부를 칭찬했다. 옛날 전자제품이 더 좋다며 수선해 파는 선풍기를 1만원에 사가고 다리미도 고쳐 가는 등 알뜰하게 사는 모습에 모든 국민이 저 이 같았으면 싶었단다.
그러나 벌이가 신통찮은 이런 수리점이 많을 리 없다. 하성, 마송 등에 몇 군데가 있었지만 지금은 다 없어지고 김포엔 유일하게 광명당만 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집이 헐리고 나면 어디서 목 부러진 선풍기를 고치나. 가전제품 대리점에선 ‘웬만하면 버리고 신형으로 한 대 사시죠’라는 답을 듣기 십상일텐데. 장사의 목적은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김씨는 김포주민들이 고장난 기계를 들고 서울로 ‘원정’가는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고장난 물건들을 되살려내는 평생의 업을 끝까지 붙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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