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운 시인 수양딸 이복실 여사와 남편 최성철씨

문둥이 시인이자, ‘보리피리’ ‘황토길’ 등의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한하운 시인의 유택은 김포시 북변동 공동묘지에 안장돼 있다. 지난 2월 28일 기일 36주기를 맞아 뜻있는 지역문인들과 수양딸 이복실 여사, 남편 최성철 정음연구회장 등이 참석해 유택에서 추도회가 열렸다. 이복실 여사를 만나 살아생전 한하운 시인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이복실 최성철 부부

△ 시인을 만나게 된 계기는.

15살 당시 명동일대에서 낮에는 일하고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명동 거리가판에 시집을 펼쳐놓았고 나는 오며가며 시집을 읽었다. 이때 가판을 하신분이 아버지(이복실 여사는 한하운 시인을 아버지라고 불렀다)와 절친한 박거영 시인이었다. 아버지는 가판을 하던 박거영 시인 옆에서 있다가 오며가며 책을 읽는 나를 눈여겨봤던가 보다. 이렇게 인연이 된 저는 이후 유네스코 건물 뒷골목에 위치한 아버지의 3층 옥탑 사무실을 드나들게 됐다. 당시 그곳은 시인들이 술 마시고 대화하는 집합소였다. 대표적인 분이 노천명 시인이다. 이후 나는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매주 했다.

故 한하운 시인
△당시 한하운 시인은 무슨 활동을 펼쳤나.

아버지는 참 따뜻한 분이다. 아버지는 부평의 신명보육원과 서울 상도동의 청운보육원을 설립했다. 젖먹이도 병이 옮길까봐 억지로라도 떼어내 보육원에서 키웠다.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영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해서 미군부대와 관계를 확보해 미군부대에서는 먹고 남은 식량들을 보육원에 매주 주기적으로 보급했다. 그리고 보살피던 아이들이 공부를 하겠다면 대학까지 공부를 꼭 시켰다. 나 역시 한하운 장학금으로 대학(성균관대)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 분은 시인이자 훌륭한 교육가이다.

△ 인간 한하운은.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첫아이를 낳고 아버지께 보여드리고 싶어 아이를 업고 옥탑 방을 찾았더니 아버지는 “여기가 어디라고 아이를 업고 왔느냐”며 불호령을 쳤다. 난 너무 속이 상해 되돌아오면서 울었는데 알고 보니 혹시나 아이에게 나병이 옮길 것을 염려한 깊은 뜻이 있었는지를 한참 뒤에야 알았다. 따뜻한 분이다.

△ 그동안 활동을 안 한 이유는

우리가 나서면 아버지를 팔아먹지 않나 하는 오해가 염려돼 은둔했다. 그러나 10여 년 전 서 모씨가 한하운 문학상이니, 노천명 문학상이니 하며 이름을 도용하여 돈을 거둬들이는 등 문제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 시인 한하운은 어떤 분인가

아버지가 쓰신 ‘나의 슬픈 반세기’의 내용이 대부분 사실이다. 아버지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절대로 문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영향을 받을까봐 시인들 술자리에는 끼지 못하게 했다. 내가 쓴 시를 내 눈앞에서 보지 않았다.(그렇게 말렸는데도 이복실씨는 문단에 등단했다) 병이 심해 잘 걷지를 못해서 주로 옥탑방에서 잠을 잤고 저술활동을 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약한 자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가르쳐 준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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