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인터뷰

한국축구의 영원한 풍운아= 6-70년대 국가대항 축구가 열리는 날이면, 동네사람들은 흑백텔레비전 앞에 구름 때처럼 모여 아시아의 최고 스트라이커 ‘이회택, 이회택’을 소리쳤다. 소리쳐 부르는 외침을 그는 외면하지 않고 우리를 행복하게 했다. 사우문화체육광장에 세워진 이회택 동상에 스포츠인 이회택이 섰다.

이회택은 한국축구에 이어지는 전설적 계보의 시작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축구가 후진성을 벗지 못하던 시절 한국축구를 아시아 최강으로 끌어올린 선수를 꼽는다면 이회택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축구의 전설적 계보는 이회택- 차범근- 박지성으로 맥을 이어간다고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김포출신 이회택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만났다.


-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당시 김포에는 축구부가 없어 처음에 한양공고로 갔다. 친지의 소개로 갔는데 2주 있다가 실력 부족으로 시골로 다시 내려왔다. 혼자 낙담하다가 백원기 씨가 영등포공고를 소개시켜줘 영등포 공고로 진학을 하게 됐다.

내가 자랄때만 해도 그 때는 스포츠라는 게 없었다. 뒷산에 올라가면 역기 갔다 놓고 평행봉이나 철봉을 하면서 노는게 전부였다. 작은 고무공, 지푸라지 말아서 만든 것을 가지고 놀았다. 뒷마당, 뒷동산에서 그냥 놀았다. 그런 놀이를 하면서 잠재적인 끼를 느껴 축구를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어렸을 적부터 싸움을 잘해 선배들이 데리고 다니면서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근성을 배운게 아닌가 싶다.

- 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시기는?

중학교 2,3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당시 리(里)대항 대회가 있었는데 양촌면 양곡리에 이현이라고 고려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서울에서 축구팀을 몰고 오고, 동네 백왕기 씨가 한팀을 데리고 와 대회를 했다. 당시 그 사람들이 하는 축구를 보니 곡마단 곡예를 보는 듯 했다. 그때 차원이 다른 축구를 느끼며 축구선수를 꿈꿨다.

- 풍운아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초고속 성장을 했다.

영등포공고에 있다가 6월에 두 번 경기를 치르자 눈에 띄어 7월에 축구명문인 동북고로 스카우트 되어 갔다. 동북고는 열 번 대회 나가면 6,7번은 우승, 두번 정도는 준우승 할 정도로 전국 최고 축구명문 학교였다. 여기서 체계적으로 훈련 받자 기량이 급성장해 이후 65년도에 청소년대표팀에 갔고, 66년도에 졸업을 하면서 그해 12월에 아시안게임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당시 대표팀 선수 월급이 삼만원이였는데 대기업 임원 월급과 맞먹었다.

- 그런 저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어렸을 적 놀이가 밑바탕이 됐고 순발력이나 스피드는 선천적으로 타고 났던 것 같다. 어릴적 기계체조를 하면서 유연성이 키워졌고 뛰어놀면서 쌓인 체력들은 선수생활에 큰 도움이 됐다. 이럼 힘으로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한지 3,4년 만에 국가대표가 됐고 대표로 10년 동안 활동할 수 있었다.

- 고속 스타가 된 부작용은 없었나

1년 선배 중에 청소년 대표가 된 선배가 있었는데 그 사람을 잡겠다는 목표로 처음에는 열심히 뛰었다. 그 다음에는 국가대표가 목표였다. 그러나 그 모든게 다 이뤄지니 허무하더라. 그래서 한때는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 화려한 축구인생에는 김포라는 고향이 있는데, 고향 김포는 어떤 느낌인가.

이회택 축구교실을 처음 할 때인 15년전만 해도, 아파트도 없고 공설운동장도 없었다. 다른 도시에서 축구교실을 요청하는 곳이 많았지만, 어렸을 적 돈이 없어 축구화는 물론 공도 못 사던 시절을 생각해 꼭 고향에서 후배양성을 하겠다고 생각을 했다. 지금은 아파트도 들어오고 많이 변해서 여기가 내 고향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고향 김포에 뭔가를 남기고 싶다.

- 배고픈 기억은

매일 배고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 뛰고 싸움질 하고 다니고 하는 것이 남달랐다. 밖으로만 뛰어다녔으니 얼마나 배고팠겠나. 배고픔을 참고 축구를 하던 시절이 나에게는 힘이다.

- 슬하에 자녀에게 축구를 시키지 않았나

딸은 결혼했고, 아들은 올해 한양대를 졸업했다. 아내가 내가 축구하는 생활하는 걸 보고 아들은 축구를 못하게 했다. 지금 손자가 하나 있는데 축구를 가르쳐 볼까 한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

요즘은 몸이 다 안 좋다. 짬나면 골프도 나가고, 시간 나면 걷기를 많이 한다(한두시간 씩). 나이 먹어서 담배를 끊으니 몸무계가 10kg이상 늘어서 연골이 상해 수술을하고 몇 년 쉬었더니 견딜 수가 없어 얼마전에는 축구는 안 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 ‘이회택=축구’ 라는 등식이 국민들에게는 인식돼 있다. 본인은 인생에 있어 축구를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가.

축구라고하면 어렸을 적부터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다. 결혼하고 자식도 생기고 하다보니 지금까지 모든 것을 걸 수는 없었지만 아직도 내 인생의 모든 것은 축구뿐이다. 앞으로 살아봐야 5년이 갈지 10년이 갈지 모르지만 축구협회일까지 은퇴를 하면 고향인 김포에서 후배 양성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지 않겠나. 내 고향에서 나보다 더 나은 선수를 하나 더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 시민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운동을 하면 일단 목표를 설정하고 최고의 선수가 되기 위해 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공부하는 사람도 힘들겠지만 운동하는 사람은 공부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도 노력이고 둘째도 노력이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런 삶이 아름다운 삶이다. 고향이 있어 좋다.

<이회택 약력>
1946년 10월 경기도 김포출생
동북고 졸업
청소년국가대표
국가대표
양지축구단 입단
메르데카컵 공동우승(최우수 선수)
킹스컵 우승
방콕아시안게임 우승
박스컵 우승
말레이지아 메르데카배 우승
한양대 감독
포항스틸러스 감독
이탈리아 월드컵축구 대표팀 감독
전남드래곤즈 감독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
(현)대한축구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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